Report(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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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엔 메세지가 있다.
"우리는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1789년의 '여성 행진'에서 영감을 얻었다. 파리 올림픽은 프랑스를 인권의 나라로 만들고, 자유의 가치를 수호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 파리올림픽 폐막식에서 여자마라톤 시상식을 계획한 이유라고 한다. 이것이 올림픽 전통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다. 개회식과 폐막식은 개최지가 메세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폐막하고 2028 미국 LA와 2032호주 골드코스트로 이어진다.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막대한 예산과 시설, 그리고 교통과 숙박, 안전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2036을 꿈꾸는 우리나라지만, 2020 아시사, 2024 유럽에서 끝나고 2028 미주, 2032 오세아니아, 2036 아시아(?), 아프리카(?) ... 아..
2024.08.13 -
체육, 정부는 보여주기식 기강잡기가 아니라, 중장기계획 새로 세울때
우리 팀코리아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얻었다. 잘했다. 팀코리아! 최저인원의 선수단 파견, 정부와 체육회의 갈등 등 많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종합 8위를 해 엘리트스포츠 성과를 보여 주었다. 이번 올림픽를 통해 스포츠현실의 문제가 부각됐다. 협회와 선수단의 갈등, 협회간 운영실태의 격차, 체육회와 정부간 갈등 등에는 변하지 않는 정책, 고령화된 협회 등이 원인이다. 모범사례도 있다. 협회운영과 선수선발 및 관리에 혼신을 다한 협회, know-how가 아닌 know-where를 아는 협회들이다. 다행인 것은 문제가 드러나고 모범사례가 있으니, 미래는 보인다. 올림픽이후 정부는 보여주기식 체육계 기강잡기가 아니라 거시적인 중장기 발전방안이 필요하다. 국내 단골연구진들의 재탕삼탕 계획이 아닌, 필..
2024.08.13 -
친일인명사전에 체육이 빠진 이유
친일인명사전에 체육인은 빠져 있다. 문화, 예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다루던 이 작업에 왜 체육은 제외되었을까? 체육학계에서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은데 있다. 체육계나 체육학계가 이 문제에 대해 참여하지 않거나 논의조차 안한다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우리 선수들의 입상은 조선인의 긍지였다. 알고보면, 큰 덩어리는 일본이고, 그 안의 조선인의 응집으로 비추어진다. 마치 프로야구의 지역 연고팀에 지역민들이 환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체육 실세들은 친일행적이 많기때문이다. 이제는 친일 체육인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친일몰이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자라나는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밝혀주지 않으면 스포츠 후세들이 나라를 빼앗겨도 존심이 살아나..
2024.08.13 -
아내를 스파이로 만든 밀정 유도사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공부를 한 후 일본에서 검도를 배웠다. 귀국해 휘문고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서 체육을 지도했다. YMCA 이상재의 소개로 오현주와 만나 결혼했다. 3.1운동이후 투옥자들을 지원하는 자선단체 혈성부인회를 조직한 신여성이었다. 정신여학교 김마리아와 동창이었고 이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아 결성해 활동했다. 강낙원은 무관학교출신 유근수와 YMCA에서 검도와 유도를 지도했다. 어느날 사라졌던 유근수가 나타났다. 대구의 형사가 된 유근수였다. 강낙원은 오현주로 하여금 애국부인회의 조직을 유근수에게 알리게 했고, 이 때 오현주의 밀고로 애국부이뇌 여성들은 체포돼 대구로 이송했다. 강낙원은 이 때 포상금을 받아 집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19..
2024.08.13 -
대한유도학교 초대교장, 이범석 장군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 초대 교장인 이범석 장군(1900~1972)이다. 청산리전투의 공로자이면서 광복군의 주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밀정들은 이 장군의 정보를 당시 밀정이었던 이정이 일제에 보냈다. "이범석은 검도, 수학, 측량학이 특기이고 키는 162cm, 안경을 썼고 풍채가 좋다."는 내용이었다.1915년 경성보통학교 재학중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수 졸업했다.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당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후에는 초대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 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1953년 대한유도학교..
2024.08.13 -
1948년 관보 제1호, '대한민국 제30년'이라 명기했다
우리나라에서 관보 발행은 1894년 갑오경장부터 시작디었으며, 대한민국의 관보는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1일 제1호가 나왔다. 대한민국 관보에 사용된 연호는 관보 제1호부터 제5호까지 '대한민국'으로 하였고,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된 이후에 발행된 관보 제6호부터 제3038호(1961. 12. 31.)까지는 '단군기원'으로 하였다. 제1호 관보에는 ‘대한민국 1년’으로 간주하지 않고 30년 전인 1919년을 원년으로 보았다(사진). 정부 수립 당시 행정부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도 나라가 있는데 이 때부터 ‘건국’(建國)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
202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