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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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무도관은 일본무덕관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위해 스포츠시설이 도쿄에 채워진다. 이 중에서 일본식 건축으로 유도경기장은 후지산 슬로프에 흡사한 지붕양식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무덕관으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일본무도관으로 알려져 있다. 1964.8.11. 조선일보 4면
2025.04.06 -
태권도는 태권도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무예와 태권도의 관계를 살펴보면, 태권도가 '한국 무예'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으며, 한국 무예=태권도라는 환경이 형성되었다. '태수도'라는 이름에서 '태권도'로 변경되는 과정에서도 유사 무예들과의 협력이나 갈등이 존재했다. 복합관계도 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 합기도 4단을 보유한 사람이 태권도 4단인 경우가 많았지만, 태권도 4단을 보유한 사람이 합기도 4단을 보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상황에는 다른 무예를 하는 스타들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김일 프로레슬러는 태권도 영화 출연을 구상했으며, 극지 가라테의 최배달은 일본 태권도 대표로 국기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수박도는 태수도 통합과정에 참여하였으나, 다시 독립무예로 탈퇴했다. 그러나 일부는 태권..
2025.04.06 -
전통무예진흥법 개정안 또 발의
전통무예진흥법 전부개정안이 다시 발의되었다.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었던 전통무예의 법률적 정의에 대한 부분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할 전통적,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에서 개정안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외의 것은 시행을 위해 필요한 사랑이 추가되었다. 이 개정안은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제심사위원회, 국회 본회의를 거쳐 연내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반대로 개정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개정안의 경우 주무부처인 문체부와 국회가 조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본계획수립, 그리고 시행규칙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2025.04.06 -
김우중과 합기도의 연(緣)
1984년 5월 23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984년 대한체육회 37개종목의 예산이 2백억원, 이 중에 1백억원은 국내 기업인들이 회장직을 맡으며 지원한 것이다. 이 기사중에 대우 김우중회장이 합기도총재를 한 이야기가 두 줄 나온다. 대우가 아프리카 진출에 합기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많은 이들은 중동으로 알고 있다. 사실 중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걸프만 국가들과 북아프리카를 일컬어 중동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우중과 합기도의 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김운용 전 IOC수석부위원장의 생전 수기를 보면, 1970년대 대우를 검찰이 압수수색을 한다. 대우가 위기에 처하자 이를 도와준 이는 연세대학교 7년 선배인 김운용 부위원장이다. 그가 정무비서관을 통해 박종규..
2025.04.06 -
중국닭(人)싸움놀이, 정규스포츠종목 등극
각투사 경기장면 . / 베이징각투사협회 홈페이지 캡처'닭(人)싸움놀이'가 글로벌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다. 어릴 적 소풍이나 동네 골목에서 즐겨 하던 깨금발 싸움, 바로 이 경기가 중국에서는 '각투사(脚斗(鬪)士, Judose)'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가체육총국 중국무술협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다.중국에서는 각투사의 기원을 5천 년 전 치우놀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고대 중국 북부 농촌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민속놀이로, 중원 평원에서 황제와 경쟁한 치우를 기념하는 의미를 지닌다. 치우놀이가 각종 축제와 경연에서 인기를 끌며, 북방에서는 목발싸움, 남방에서는 닭싸움으로 불리던 이 놀이는 이제 스포츠로서 발전했다. 이 경기는 기업인 우예다가 2005년부터 다년간의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경기화..
2025.03.30 -
김일선수는 은퇴후 속초에 있었다
1970년대말 장영철파동이후 레슬링이 침체되고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로레슬링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김일은 속초를 향했다. 그곳에 김일수산을 차렸다. 명란젓과 미역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수산물을 수출하기 위해서다. 특히 일본에서 '다라코'로 불리는 명란젓은 인기가 있었다. 김일은 이 명란젓 장사로 배를 8척을 가질정도로 돈을 벌었다. 연간 900톤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중반 명태가 잡히질 않았다. 결국 문을 닫았다. 김일은 그 이전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1960년대 일본에서 큰 돈을 벌어 왔을때 강남 허허벌판이 평당 125원이었다. 땅을 사기로 한 그 해, 극심한 가뭄이 왔다. 대통령까지 논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볼 정도였다. 김일은 땅 5만평을 살 돈을 국가에 내놓았다. ..
202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