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Sports(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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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국제고 정치적 해석이 아닌 교류다
일본의 의원과 극우세력들의 득세에 여름 고시엔 우승팀인 교토국제고는 우승의 기분도 제대로 못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 학생스포츠세계에 너무 정치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스포츠계의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참의원인 하마다 사토시 의원이 교토국제고의 교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해'가 아니고 '동해'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이외에도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교토국제고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교토지사가 자제 요청을 했다. 니시와키 다카토시 교토지사는 자제를 요청하며, 악성 글에 대해서는 법 부처와 협의해 삭제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학교내에서도 교가에 대한 문제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동해'와 '한국학원'이라는 두 부분에 대해 갈등을 초래..
2024.08.25 -
교토국제고 처럼 우리 고교야구에도 애정을 줄 순 없을까?
어제 교토국제고의 우승으로 야구팬들만 알던 일본 고교야구와 교토국제고 이야기를 일반인들까지 확대되고 있다. 교토국제고 우승을 알리는 호외가 돌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차분한 분위기다. 우리같이 요란하지 않은 일본사회의 분위기로 생각된다. 우리도 확 타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습성이 있으니, 또 다른 이슈를 찾는 분위기다. 이번 일본 고교 야구를 보며 우리 고교 야구를 생각해 본다. 나의 초등학교시절 야구부가 있었다. 우리 때는 청소년대표도 있었고, 그 뒤 프로선수도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 때는 매일 배달되는 학습지에도 하단에 만화주제가 야구였다. "z비구"가 기억난다. 중학시절에는 축구부와 육상부가 있다가, 고교에는 야구부, 육상부, 체조부, 유도부, 검도부가 있었..
2024.08.24 -
고마키 노리츠구, 도쿄국제고 감독이 한 말
고마키 노리츠구 교토국제고 감독 "하루라도 더 오래 이 아이들과 야구하고 싶다고 대회 전에 말했는데, 솔직히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 아저씨에게 멋진 여름방학을 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 이 감독은 교토국제고가 창단 원년 34:0으로 졌던 상대팀 내야수였다고 한다.
2024.08.23 -
교토부, 교토국제고에 스포츠상 수여 예정
교토부는 여름 고시엔 전국 고교 야구에서 교토지역 고교가 68년만의 우승을 이룬 교토 국제고의 경식 야구부에 교토부 스포츠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또한, 최근 교토국제고에 대해 악플들 역시 삭제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시와키 교토 지사(사진)는 23일 결승전을 고시엔에서 직접 관전한 뒤, 교토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전국의 강호교를 상대해 기개 넘치는 전력 플레이로 차례차례로 승리를 거듭하면서 오늘도 매우 치열했던 경기에서 감동을 주었다”면서, “68년만의 교토의 고등학교 우승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기뻤다.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는 교토부 스포츠상의 우수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계 민족학교로 출발한 교토 국제고를 둘러싸고 "인터넷상에서 민족..
2024.08.23 -
교토국제고, 여름고시엔 우승
교토 국제고가 여름 고시엔에서 우승했다. 9회까지 0대0, 연장 10회에서 2대1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교토 국제고 선발투수 나카자키 류세이와 간토제일고 선발투수 하타나카 테츠신이 나와 서로 경쟁하듯 투구를 펼치며 5회까지 0대0을 이어 갔다. 6회말이후 양 팀은 득점기회가 있었으나 살리지 못하고 9회까지 0-0 무승부로 끝났다. 연장 10회초에 들어선 교토 국제고는 노아웃 상황에서 땅볼로 1점을 얻은 뒤 미타니 세이야가 우익수 방면 희생플라이를 쳐 추가점수를 확보해 2점을 앞서갔다. 교토국제고는 좌완 투수 가주키 니시무라가 내야 땅볼로 1점을 남기고 1아웃을 잡았지만, 다음 타자를 1루 땅볼로 잡아내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10회말 관동제일고는 집중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1점을 득점하는데 ..
2024.08.23 -
고교야구 응원
1905년 한성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된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왜 야구를 좋아했을까? 석전(石戰)을 잘 하던 민족이어서 그럴까? 1920년대 야구조직이 결성되자, 각종 학교 대항전이 열렸고, 일본인학교와도 경쟁을 했다. 야구 장비를 장만하지 못하면 권구(拳球, 짬뽕, 찜뽕)을 장려하였으며 전국대회뿐만 아니라 해방직후 소년체전 종목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모교에는 야구부가 있다. 학창시절 서울시대회 결승이나 전국대회 4강에 진출하면 전교생이 수업을 중단하고 응원을 갔다. 학교간 응원전도 있었고, 학교에 응원부가 있었다. 외야석은 재학생들이, 내야석은 동문들이 가득 채워졌다. 경기가 끝나면 재학생들은 집으로, 동문들은 동대문운동장 주변 식당과 술집을 가득 채웠다. 이기든 지든 여기저기 교가를..
2024.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