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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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게이코(土用稽古)
우리가 모한훈련과 모서훈련은 알고 있지만, ‘도요게이코(土用稽古)’는 자주 들은 용어는 아니다. 대신 장어 먹는날인 도요노우시노히(土用の丑の日)는 잘 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도 도요게이코를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모한훈련과 모서훈련으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도요게이코도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유도에서는 찾을수 없고 검도에만 있던 독특한 수련 문화다. 격검이나 검도수련에 ‘도요(土用, どよう)’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주역(周易)》의 오행에서 차용했다. 계절을 다섯으로 나누는 것이 어려워, 봄(木), 여름(火), 가을(金), 겨울(水)로 배당하고 각 계절이 바뀌기전 약 18일간을 ‘토용(土用)’이라 불렀다. 토용의 마지막 날은 절분이다. 토용기간에는 땅을 파는 직업은 휴무다. 땅의 기운을..
2024.02.14 -
1963 태수도는?
516군사 쿠테타가 일어나고 1961년 태권도는 '태수도'라는 이름으로 통일하여 협회를 만든다.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설립되기까지 명칭은 '태수도'가 되었다. 각 관의 주축세력이 30대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그들은 연대해 '대한태수도협회'를 창설한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그들은 힘이 되줄 인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은 인물이 채명신 장군이다. 아래 기사는 1964년 4월로 경남태수도협회 김종림회장의 글이다. 그는 태수도가 무술판에서 왕중의 왕이라고 했다. 유도와 함께 치켜 세웠다. 범죄검거에도, 나라를 지키는데도 태수도가 효과적이라고 홍보했다. 웃기는 것은 '태수도'라는 단어가 개명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태수도를 수련한 유단자입장에서 무술사의 지식이 짧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
2024.01.29 -
최초의 월남 태권도시범은?
1959년 최초의 월남 태권도 시범은 무엇을 보여 주었을까? 최초의 시범 날짜는 1959년 3월 9일 사이공운동장에서 선보인 태권시범이다. 이에 대해 윤종걸사범은 시합과 시범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약속대련이다. 시합에는 유도2단 거인과의 대전을 시작으로 하여, 시범에는 총검對태권, 단도對 태권, 낙법對연공이었다. 월남도 반공국가였다는 점에서 우리와 닮은 상황이었다. 사이공은 베트남어도 사용하지만, 프랑스어도 모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살던 나라였다.
2024.01.28 -
격검사망사고
1900년대 검도를 격검(擊劍)이라 부르던 시절, 생각이상으로 경찰과 헌병에 의무 보급되면서 당시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스포츠와 관련해서는 YMCA와 근대학교를 중심으로 알려진 반면, 격검은 경찰과 감옥소, 헌병 등의 종목으로 보급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호구라는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 때문에 유도와 또다른 보급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1년 부산경찰서 연무장에서는 격검을 하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검도를 하다 숨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 원로들이 젊은이들과 합동수련중에 발생하는 사고들이었다. 아래 보도자료를 보면, 사망자를 순사부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젊은 나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김주안선생님은 젊은 나이로 추정함)
2024.01.23 -
명동에 유술도장이 있었다
1932년까지(현재까지의 기록) 명동에 유술도장이 있었다. 1930년 경성에는 '유술柔術'이라는 명칭보다는 '유도柔道'로 사용했다. 그런데 1930년 신문광고에 명동의 파출소입구에 있던 '양무관 유술 도장'에서는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유술도장에서 뼈와 관련된 치료를 하는 접골원이 아니었나 싶다. 과거 유도 4단이상은 접골사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도 법률은 남아 있으나, 1960년대말부터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유술도장이라고 했을까? 19세기말 가노지고로가 니혼교 부근 도장을 방문했을때의 분위기일까? 이 광고는 줄기차기 1924년부터 1932까지 여러 신문에 나온다. 원래 병원자리를 인수한 모양인데, 요즘의 접골원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맞을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
2024.01.23 -
공수도 청도관의 미츠야마는 누구인가?
1945년 해방을 4일 앞두고 미츠야마 마사오(光山正雄) 사범에 의해, 서대문구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청도관(靑濤館)'을 연다는 기사다. 우리 태권도史에서는 이원국사범이 1944년 1월에 귀국, 8월에 지금의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당시 영신학교(永信學校) 강당을 빌려 한국에서 최초로 당수도청도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국태권도의 보급에 투신했다는 주장과, 1946년 2월(27일) 서울 시천교당(侍天絞堂) 자리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가라테 보급에 나섰으며, 청도관의 ‘도(濤)’는 자신이 무술을 익힌 일본 공수도(가라테) 송도관의 ‘도(濤)를 차용 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츠야마 마사오(光山正雄)는 누구인가? 후나코시 키친(航越義珍)의 제자이고 동경의 여러 대학에서 공수도..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