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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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씨름
캄보디아 벽화의 씨름이다. 중요한 축제가 있을 때면 각종 연극이나 그 밖의 다양한 장면 등 다양한 '게임'이 나타난다. 이 중에서 씨름과 몸을 사용하는다양한 서커스와 같은 재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왕 앞에서 왕을 즐겁게 하기도 하였고, 간혹 승자에게는 상도 주어졌다. 이러한 씨름의 전통은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오랫동안 존재했다. 씨름 유형이 띠(belt)씨름이다. 서커스까지 이어지는 퍼포먼스에도 함께 하고 있다.
2023.04.19 -
누가 가노 지고로를 뛰어 넘을까?
무예를 연구하는 사람은 현대 유도의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 1860-1938)를 공부해야 한다. 가노는 유도만 정립한 것이 아니다. 국제스포츠, 무도, 유도, 유파 유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가노의 이론을 깨는 유도인이 없다. "유술(유도)은 무예의 어머니다."라고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검술, 창술, 봉술 등의 술리(術理)도 맨손무예인 유술의 원리와 통하며, 유도의 원리는 자연체(自然體)의 묘용(妙用)으로서 몸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수행으로서의 유도다. 가노는 유도의 가타(本)연습과 자유연습법(겨루기)을 정립했고, 자연체 원리, 부드러움의 원리, 기울이기의 원리 등의 유도 원리를 정립했다. 누가 가노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2023.04.19 -
토르(Tulou, 土樓)와 무술문파
중국 남동구 푸젠(Fujian)에 있는 토르(Tulou, 토루(土樓))다. 무술 공부에서 별걸 다 한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술은 늘 인간사와 함께 해 왔고, 상상의 무술을 하더라도 인간은 강하고자 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실제 강해지고자 몸을 만드려 애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토르는 13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비옥한 산악 지역에 만들어진 공동 주택이다. 전쟁 등으로 이전한 민족들이 원주민들과의 갈등이나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공동체가 당장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공동 생활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동 주택에는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어쩌면 최초의 맨션 아파트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나라 초기 아파트들도 이런 식으로 가운데 공간을..
2023.04.19 -
무예 예법의 본래 의미는?
무예에서 왜 예(禮)를 강조할까요? 언제부터 이런 예법(禮法)이 무예에 적용되었을까요? 여기에서 '도장삼례(道場三禮)'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을까요? 국기에 대한 예, 스승에 대한 예, 상호간의 예는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진 용어일까요? 무예계에서는 무예에서의 예법은 유교의 영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깊이 들어가면 선(禪)와 밀접합니다. 올바른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몸의 중심을 안정된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자세가 앉아 있을 때는 정좌(正坐)가 되는데, 우린 벌 세운다고 생각했고, 어른들은 인내력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정좌도 바른 자세를 갖추면 오히려 더 편한 자세가 됩니다. 자세가 바른 상황을 만들면 무예동작과 예의동작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래..
2023.04.16 -
4차산업시대의 무예는?
어떤 시장보다 엄격하고 냉혹한 미술과 음악세계에서는 어설픈 모작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예는 의외로 모방에 대해 너그럽다. 어쩌면 무예가 하나에서 여럿으로 분파되고 분화된 영향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무예와 무예가 만나 변용되고 공존하거나 사장되거나 새로운 무예로 만들어지는 산물이서가 아닐까? 무엇보다 守-破-離라는 수련체계에서 독립되기전까지의 지키미 공부의 영향때문은 아닐까? 음악과 미술과 무예는 무엇이 다를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風을 잇고 새로운 창작의 세계는 무예에서도 守-破-離라는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너무 빠르거나, 과정을 무시하는게 지금 무예계의 현실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하산하여라." 빨리 하산한다. 한 스승을 벗어나면 또다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
2023.03.30 -
황국신민체조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화정책은 각종 학교에서도 교육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일본의 무도정신과 체력강화를 위한 황국신민체조를 비롯한 검도와 나기나다는 초등교육에서도 이루어졌다. 검도와 유도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도 했다. 무관학교출신들중에 검도와 유도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황국신민체조를 통해 황국신민화를 꾀했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해방이후 일본, 만주, 조선, 대만에서 검도를 했던 고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세들은 일본 유학생들과 조선의 일본 순사들이었다. 유도가 친일과 반일 유도인들의 팽팽한 경쟁과는 달리, 유도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이들이 그대로 장악했다. 검도와 유도뿐만이 아니라, 체육전반이 그랬다. 광후하동국민학교.1938
202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