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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세력에 의해 생산 유포된 화랑의 의미는 다르다
그는 신라 화랑은 그동안 사회, 정치세력에 의해 그들이 필요한 화랑의 모습을 생산,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갈등의 한국사의 시대변천에 따라 화랑을 보는 시각이 계속 달라졌다는 것이다.
유교지상주의적 <삼국사기>에서 화랑에 대한 부분도 열전에 나오는 69명의 인물중 21명이 '멸사봉공'으로 이름을 날린 이미지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화랑상을 불교화해 신라가 부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불국토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도교적 취향이 강했던 이규보(1168-1241)나 이인로(1152-1220)이 사선(四仙; 네명의 국선)이라 일컫는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을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자연을 즐기고 도와 하나가 되는 옛 도사로 묘사하기도 한점 등을 고려해 같은 옛 제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어 근세에서도 화랑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게 대립적으로 해석되었다. 실학자인 이익의 경우는 화랑제도를 인재등용방법으로 이해했고, 근대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화랑을 일차적으로 '한국적 무사도'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일본 어용학자들이 무사도를 일본의 남성적 민족성과 한국인의 비겁함, 태만함, 여성스러움을 대조시킬때,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우리에게도 남성다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과제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단재 신채로는 화랑들의 무공과 무사정신을 찬양했고 화랑사상을 고대 무속신앙인 소도신앙과 관련시켜 우리 고유 사상의 진수로 해석했을뿐만 아니라, 사대주의에 맞선 우리 고유 화랑사상의 발로로 윤관의 여진정벌이나 묘청의 반란까지 해석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채호보다 더 고증정신이 강했던 인물로 민족주의 국학자 안확(안자산)을 꼽기도 했다. 안확은 "고대 조선의 무사도의 꽃, 화랑"이라고 하며 우리 고유의 무사도가 서양의 기사도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그의 저서 <조선무사영웅전>(1919)에 언급했다.
하지만 1930년대 좌파지식인들은 화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태준(1905-1949)은 "노예 반란의 진압 준비를 위하야 무장하여 군사연습을 일삼았던 노예주들의 자위단"으로 보았다. 이 사관을 시작으로 삼은 북한의 사학자들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정통으로는 보는 관점에서 세속오계를 '반동적인 도덕규범'으로 규정하고 화랑들의 전공(戰功)에 대해 '범죄적인 동족상잔에서 얻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안확류의 민족문화론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관용사학은 독재시절에 화랑에 대한 국수주의적인 찬양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시대에는 3.1운동까지 연관시키고 화랑정신을 애국, 멸공정신의 원조격으로 제기해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로 부르거나 유신초기에는 경주에 서라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유사(類似)전통양식의 화랑교육원까지 생겼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정희식 군사주의가 상대적으로 퇴조하고 성에 대한 터부가 깨진 입장에서 김별아의 <미실>이나 심윤경의 <서라벌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화랑들의 동성애와 이성애, '비보이처럼 현란한 무예훈련' 등이 강조돼 화랑은 민족 전사에서 얼짱과 몸짱, 그리고 섹시남으로 변신하고 있다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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