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스파이로 만든 밀정 유도사범
2024. 8. 13. 08:34ㆍ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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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공부를 한 후 일본에서 검도를 배웠다. 귀국해 휘문고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서 체육을 지도했다.
YMCA 이상재의 소개로 오현주와 만나 결혼했다. 3.1운동이후 투옥자들을 지원하는 자선단체 혈성부인회를 조직한 신여성이었다. 정신여학교 김마리아와 동창이었고 이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아 결성해 활동했다.
강낙원은 무관학교출신 유근수와 YMCA에서 검도와 유도를 지도했다. 어느날 사라졌던 유근수가 나타났다. 대구의 형사가 된 유근수였다. 강낙원은 오현주로 하여금 애국부인회의 조직을 유근수에게 알리게 했고, 이 때 오현주의 밀고로 애국부이뇌 여성들은 체포돼 대구로 이송했다.
강낙원은 이 때 포상금을 받아 집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1921년 조선무도관을 설립하고, 1927년 조선씨름협회를 설립했으며, 1934년 전조선아마튜어권투연맹을 창립했다.
해방이후에는 대한검사회(대한검도회 전신)를 만들어 임시회장을 했고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을 지내다, 1949년 부인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아내를 밀정으로 만들어 매족행위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 번의 밀정이었지만 그 파장은 컸고, 그가 체육계에서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체육계 논문들을 보면 그의 체육성과만 연구되고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 그런 체육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체육계 무예계 연구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밀정 부문에 선정되었다.
아래는 일제강점기 신문에 나온 강낙원의 경력이다.
시내 원동에 있던 조선무도관장 강낙원씨는 개국 503년 출생하여 19세때 경성고등공학교의 전신인 관립 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에 유학하였다가 1906년에 협성실업교자리인 오성학교지하실에 조선에 처음으로 경성체육연습소에서 유도를 배웠으며, 1911년 유도와 검도를 교수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에 안국동 공영여관자리로 옮겨가 있다가 4년후 다시 오성학교 지하실로 돌아와 이리저리 간판을 등에 걸고 유도와 검도를 지도했다. 1919년에는 종로청년회 유도부 교사, 1920년에 경성체육연습소를 무도관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맡아오다가 금원동에 도장을 세우고 유지의 원조를 더해 도장 전체를 운영하였다. 이것이 조선무도관이다. 1930년까지 양성한 수련생은 유도, 검도, 권투 세 개부에 120여명. 많은 수는 아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사범을 겸임하여 다수를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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