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 검도 개척자, 박영헌 선생

2024. 7. 21. 13:30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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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의 검도보급을 위해 헌신한 박영헌선생의 이야기다. 전국의 각 지역에서 검도를 일으켜 세운 초창기 인물들중 한명이다. 매년 제자들이 추모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그는 남해 검도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된 자료는 월간 검도세계의 기사와 남해 미래신문의 기사에 자세히 보도된 바 있다. 

 

아래는 남해 미래신문이 박영헌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전영식(jys23@nhmirae.com)기자가 올린 기사( 2019년 12월 06일(금) 15:15 )다. 

박영헌사범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 제공 - 남해시대신문

故 박영헌 선생은 1919년 2월 남면 당항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오사카 센이진조 소학교와 이쿠노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11월 10일 검도 초단을 취득한 선생은 이듬해인 1938년 4월 20일 하세카와 에이신류 거합도 초단을 취득하며 당시 검도와 거합술을 함께 수련했다.

1943년 4월 15일 거합도 3단 승단과 동시에 오사카 무덕관에서 사범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같은해 검도 3단에 올랐다. 당시 3단은 현재 5단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조선인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심했던 일제 강점기에 선생의 천재성을 일본에 인식시킨 계기가 됐다. 특히 검도는 일본의 국기(國技)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상징적인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인이 지도자로 활동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대단한 성취로 평가된다.

소학교 시절부터 검도는 물론이고 음악과 야구, 가라데와 유도 등에서도 두각을 보였던 선생은 삼촌이 일본인과 다투다 칼에 맞는 사고를 계기로 12세때 무덕정에서 검도에 입문한 뒤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검도인으로 한 평생을 살았다. 처음엔 유도에 더 관심이 컸던 선생은 작은 키 때문에 검도에 더욱 매진했으며, 157cm의 단신이지만 검도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 검도사범이라는 지위 덕에 징병을 피할 수 있었으며, 일본 폭력조직인 야쿠자의 수차례 입회 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 검도인의 길을 걸었다.

22세에 일본에서 정봉선 여사와 결혼한 박영헌 선생은 광복 후인 1948년 귀국, 이듬해인 1949년 고향인 남해군에 다시 뿌리를 내렸다. 정착 초기에는 일본에서 배운 사진기술로 생계를 유지하며 야산을 개간, 평탄작업을 한 뒤 후학들에게 검도를 가르쳤다. 초창기 수련생들은 도복 대신 사복을 입었고, 왕대를 깎아 죽도를 만들었으며, 호구는 일제시대 경찰이 사용하던 호구를 직접 수리해 사용했다.

후학을 가르치고 낚시를 유난히 좋아해 청빈한 생활을 즐기던 선생은 1953년 대한검도회 창단과 함께 4단을 취득한 뒤 1958년 12월 15일 경남경찰국령도 사범에 임용돼, 남해경찰서 상무대에서 1970년대까지 경찰관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검도를 가르쳤다. 1958년 12월 20일에는 대한검도회 남해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선생은 1962년 제43회 전국체전에 경남대표로 출전한 것이 계기가 돼 총 16회에 걸쳐 경남대표로 각종 대회에 출전했으며, 특히 1963년 부산에서 열린 경남 각 경찰서 대항 검도대회, 제5회 마산대회, 제7회 충무대회, 제8회 울산대회 등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1971년 남해중학교 순회코치로 임명돼 이듬해 처음으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 남해중학교 검도팀을 경남대표로 출전시키는 등 총 15회의 소년체전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1982년 신군부의 공무원 감원계획으로 인해 도 순회코치를 그만 두게 된 선생은 1989년까지 안빈낙도의 생활을 했다.

워낙 청빈했던 선생은 수중에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강아지를 키워 팔면서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등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으나 1989년 12월, 선생의 막내 아들 승철 씨가 폐교된 남해여중 교실을 빌려 남해검도관을 개관하자 손수 관원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칠순이 넘은 노구임에도 선생은 직접 호면을 쓰고 관원들을 가르칠 정도의 노익장과 검도에 대한 애정을 보여 줬으며, 한편으로는 남해중학교 검도부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조일래 선생과 강호훈 선생을 도와 학생들에게 검도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또 틈틈이 시간을 쪼개 경상대 이양 교수와 평검회 회원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리나라 검도발전에 쏟은 사랑과 열정을 높이 인정하는 원로들의 추천으로 1994년 8월 1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검도 범사 칭호를 받았으며, 1996년 10월 1일 검도 8단으로 승단했다. 남해군에서도 선생의 체육발전에 힘쓴 공을 인정해 1997년 10월 27일 군민의 날 및 화전문화제 행사에서 체육부문 군민대상 수상자로 결정, 군민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99년 9월 17일 기관지 천식 등 노환으로 진주 경상대 병원에 입원한 선생은 3개월간 혼수상태에 있던 중 그해 12월 15일 오후 6시경 평생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의 슬픔과 오열 속에 남해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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