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형국기게양대를 만드려 하는가?
2024. 7. 21. 09:44ㆍReport/City Marketing
728x90
반응형
서울 광화문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겠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혈세 낭비라고 이야기하며 반대하는 분위기인데, 서울시장과 서울시는 왜 국기게양대 건립을 고집하고 있을까?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100m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를 만든다는 구상을 밝혔다. 서울 강북 구도심 한가운데를 국가 상징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단순히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사업이 아니라 정부도 참여하는 국가사업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남산에 국기게양탑이 있었다. 일제 이전에는 철당간이 있어서 국가나 지역을 상징하는 기를 올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접어들자 황국신민화가 이루어지고, 일제는 주요 도시의 산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하였다. 1932년 경성과 개성에 대형 게양대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1932년 5월 경성일보에 남산정상에 히노마루가 휘날린다며, 대일본국기선영회 조선본부장이었던 오쿠보(大久保)라는 사람이 국기게양탑을 봉납해 백척의 철주(鐵柱)위에 일장기를 올린다는 이야기다. 이 장소는 국사당이 있던 곳으로 100척높이(33.33m)에 70척 지점에 7척 평방의 노대를 설치하고 18척×27척(6×9m) 크기의 일장기를 설치했다. 1932년에는 개성의 자남산(子男山) 정상에도 국기게양탑이 건설됐다. 여기서 자남산은 서울의 남산과 같은 위치의 산이다. 이 산의 정상에 개성신사를 지었고 남서쪽에서는 개성판 황학정으로 불리는 관덕정이 있었다.
이외에도 전국의 주요 신사가 있는 자리에 대형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국기 게양탑을 설치한 이유는 비상 시국시 일본의 국민사상 통일에 있다. 왜 1932년부터였을까? 1932년 1월 22일자로 이뤄진 정무총감의 통첩 ‘국기게양방 여행(國旗揭揚方 勵行)에 관한 건’ 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노골화하던 때이다. 당시 매일신보(1932.2.3.)의 보도내용중 국기게양 관련 정동총대(町洞總代) 대표자 간담회를 통해 확정한 실천요강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증유(未曾有)의 국가적 중대한 시국에 감(鑑)하여 국민정신의 작흥 및 존황애국(尊皇愛國)의 관념을 환기하기 위하여 2월 11일 기원절을 기하여 국기게양의 철저적 여행(勵行)을 실현할 일
2. 정동 총대는 먼저 이첩한 국기게양에 관한 정무총감의 통첩의 취지를 매호(每戶)에 철저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아직 국기를 소유치 아니한 자를 조사하여 차제 그 구입을 설득할 것
3. 정동총대는 그 정동에 재(在)한 국기 구입 희망자를 모아 공동구입의 편익을 주도록 특히 주선할 일
4. (경성) 부(府)는 부내 황금정 3정목 오쿠보국기판매점(大久保旗店)에 교섭하여 아래 표와 같이 특가로 다시 특별 할인케 할 것
5. 국기 게양의 권설독려(勸說督勵)에 대하여 최기(最寄)의 경찰관 파출소의 원조 협력을 구할 일
6. 국기게양의 대운동을 전부(全府)에 일으켜 각 단체의 협력 응원을 구하고 일제히 활동을 개시할 일
1) 부 관계 각 학교를 통하여 생도(아동)의 가정에 격려 권유할 것
2) 정동총대(町洞總代), 방면위원(方面委員)을 통하여 격려할 것
3) 경찰관을 통하여 독려할 것
4) 동민회(同民會), 청년단, 재향군인회(在鄕軍人會), 기타 교화단체를 통하여 장려할 일
7. 국기게양에 제(諸) 주의를 철저케 할 것
국기는 자부심과 충성심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고 국민들이 하나 되는 상징이기도 하다. 일제는 그것을 노렸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728x90
반응형
'Report > City Marke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시 고가도로정책에 밀려난 문화재 독립문 (0) | 2024.07.28 |
---|---|
신라의 랜드마크, 황룡사7층목탑 (0) | 2024.07.21 |
중앙아시아 보검이 신라에 나타난 이유 (2) | 2024.07.20 |
경북 봉화에 베트남 밸리를 구상하는 이유는? (5) | 2024.07.20 |
사라진 청계고가도로 (0) | 2024.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