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서 현대까지 맥을 잇는 석전(石戰)

2024. 6. 11. 05:01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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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보면, 나라 풍속에 무뢰배가 큰 길에서 두 패로 나뉘어 돌이나 기와를 가지고 서로 치고 혹은 몽둥이(短梃)까지 사용하여 승부를 가렸는데, 이 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 (고려사, 1380). 고려 후기에는 척석희(擲石戱)를 금지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석전은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도 성행했다. 수십에서 수백명이 석전을 했던 기록들이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석전으로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이 위태로워도 이를 문제삼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석전은 전쟁터에서도 효율적인 전투방식이었다. 1510년 왜를 정벌할때도 돌을 잘 던지는 이들을 선봉으로 내세워 적군의 활동을 제어한 모양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석전의 기록에 나타난 유명한 장소는, 서울에서는 만리재 고개와 청계천이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 석전꾼들이 유명했고, 조선후기에는 평양 석전꾼들이 유명했다고 한다. 승리한 석전꾼들은 마을에서 환영을 했고, 패한 석전꾼들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고 노숙을 한 모양이다. 

 석전의 영향으로 등장한 것이 운동회에서 하던 박 터트리기다. ‘오재미’로 물리는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로 만든 것을 박을 향해 던져 터트리는 게임이다. 원래 일본의 ‘오자미 놀이’가 유입된 것으로 보이나, 석전을 많이 했던 우리에게 더 인기가 있었것으로 보인다. 

이 석전은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다름아닌 다양한 집회현장에서다. 특히 80년대 중후반의 투석전은 전투를 방불케 했다. 특히 4월과 5월의 민주항쟁 집회에서 투석전은 당시에도 가장 위험하고 부상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직접 석전을 관람한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다른 나라의 기록에는 토마토 던지기, 오렌지 던지기 등의 놀이가 있다. 우리 석전을 미개한 문화로 치부할 것인가? 석전은 억압과 분노의 표출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석되었다는 것은 우리 민중들이 그 만큼 오랫동안 억압받아 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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