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원경

2024. 5. 1. 16:01In Life/Worldly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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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회는 독립전쟁기에 활용할 간호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9년 1월 31일부터 3개월의 속성 과정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 출신인 김창세, 곽병규, 정영준 등의 노력으로 김연실, 김원경, 이경신, 이화숙, 오남희, 김순애, 이봉순, 김현숙, 이매리 등 9명이 졸업하였다.

 

극동민족대회는 제3인터내셔널 주도로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각국의 독립투쟁 방략을 논의한 대회다. 서구 열강들이 조선독립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오고 반면 소비에트 러시아가 식민지 반식민지해방투쟁을 지원하자 조선 대표 56명이 조선독립을 위해 이념과 종교를 넘어 함께 참석한 대회였다. 발굴한 영상에는 당시 54세였던 홍범도 장군뿐만 아니라 여운형 선생, 최진동 장군, 현순 목사, 김규식 선생, 김원경 선생, 권애라 선생 등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은 레닌을 직접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방략과 의견을 나눴다. 특히 레닌은 조선 독립군 대장 홍범도에게 권총과 금화, 외투 등을 선물했다.

 

1919년 10월 11일 촬영된 상해 임시정부의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원경. 김원경 뒤에 백범 김구 선생이 있다. (자료 한국이민사박물관)
1945년 상해에서의 최창식, 김원경 부부 가족 (자료 한국이민사박물관)

김원경(金元慶, 1898~1981)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동년 4월에 최숙자, 김희옥 등과 함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애국부인회의 특사로 상해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동년 9월에 혈성단과 통합하여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이화숙을 회장에 추대하고 김원경은 부회장이 되었다. 1920년 11월에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이 조직되자 그녀는 최창식과 같이 서구 의원에 뽑혀 교민 복지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는 권애라와 같이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각국 대표에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김원경은 함께 활동하였던 최창식과 결혼하여 임정의 뒷바라지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1930년 4월 최창식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20년에 걸친 독립운동 활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3년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각기병이 생겨 거의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아내 김원경이 1941년부터 상해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부부는 해방 이후에도 1957년 최창식이 사망할 때까지 상해에서 머물렀으며 이후 마카오, 홍콩 등을 거쳐 1960년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1981년 김원경도 별세했고, 부부는 1986년 8월 27일 서울 국립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됐다.

이현아 한국이민사박물관 학예연구사(재외동포신문)의 글을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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