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세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
2010. 5. 4. 17:52ㆍReport/Good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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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통에세이>에 좋은 글이 올라와 있다. 공부만 하는 아이들, 그들에는 놀 권리도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고 있다. 평소에도 시스템문제를 거론하며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보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게 풀어가지 못하고 있다.
구속받는 아이들에게 과연 창의력이 나올 수 있을까. 흔히 우리는 "학교 모범생이 사회 모범생이 된다는 보장은 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나밖에 모르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를 밝혀주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책임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경향신문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원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5021812265&;code=990000
‘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 ‘교실에 열 시간 앉아 있으면 살아있는 미라가 되지만, 그 시간 절반만이라도 쪼개서 도서관에 가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보면 강시나 좀비도 사람으로 되살아난다.’ ‘하루에 세 시간 이하만 학과공부 하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지만, 다섯 시간 이상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으면 십중팔구 떨어진다.’ ‘마음껏 뛰어놀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재잘대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쓰일 곳이 없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리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고, 머리만 굴리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내가 교육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학교 수업일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고, 아이들을 몇 달씩 산과 들과 바닷가에 풀어놓겠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도 학부모도 해방감을 만끽하고, 살아있는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하겠다.’ ‘지금 세상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그 탓은 죄다 잘못된 교육에 있다.’ ‘교육이 필요한 까닭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이웃과 오순도순 도와가면서 살 힘을 길러주려는 것인데, 부모도, 교사도 스스로 손발 놀리고 땀 흘려 일하는 본보기를 보이지 못하고, 도우면서 살아갈 길 대신에 남의 처지 돌아보지 말고 제 몸뚱이만 챙기라 부추기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아이들에게 살 길을 열어줄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 나는 입만 벙긋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말을 지껄인다. 사석, 공석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머리만 굴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마련할 수 있나? 없다. 손발 놀려야, 몸 놀려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배우고 있나? 어른들은 어디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 내가 보기에 온 세상 ‘학교’라는 곳 거의 다 이름만 학교지, ‘수용소’ ‘처형실’ 구실을 하고 있다. 가르침도, 배움도 없다. 이 일에 ‘대한민국’이 가장 앞장서고 있다. 이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나? ‘근거 없는 비방’이라는 소리 안 들으려면 그 까닭을 밝혀야겠지. 밝히지 뭐.
지금 이 나라 공교육, 사교육 현장에서 교육 종사자들이, 또 학부모들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몸 못 놀리게, 손발 못 놀리게 딱딱한 걸상에 열두 시간, 열여섯 시간 얼차려 자세로 묶어 놓고 머리만 굴리라고 강요하고 있다. 손발 묶는다는 게 뭔가? ‘강제 수용소’나 ‘감옥’에서조차도 중범자가 아니면 손발이 묶이지 않는다. 손발 놀리지 못하게 하고 몸 못 놀리게 하면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다. 죽은 목숨이다. 왜냐고? 손발 놀리고 몸 놀릴 수 있어야, 그러는 사람이 있어야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칩을 먹고 살 첨단과학 시대가 도래한다고? 그딴 것 석유나 석탄에서 죄다 뽑아낼 수 있다고? 그래도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새 세상’이 그렇게 해서 온다고? 제 정신인가?
산 사람의 손발을 묶고 몸 못 놀리게 만드는 것은 한마디로 사형선고다. 죽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집단 사형선고가 이른바 ‘교육현장’이라는 곳 도처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있다. 이건 교육학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처형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교육 아닌 교육 계속해서 시키면, 스스로 제 앞가림 할 수 있고 오순도순 서로 돕고 살아갈 힘 길러주지 않으면, 머지않아 ‘강시’로 ‘좀비’로 쏟아져 나와 이 세상을 아비규환 아수라장으로 바꾸어 놓을 게 불 보듯이 환하다.
하루에 세 시간 넘게 아이들을 교실 안에 가두어두지 말자. 도서관에서 저 보고 싶은 책 실컷 뒤지게 하고, 저 나름으로 삶에 필요한 정보 얻어서 그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동아리 모임을 갖게 하자. 학교 운동장이나 옥상이나 베란다 따위를 절반 이상 텃밭으로 바꾸자. 도시 학교에서는 그것만으로 몸놀림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 풍물이나 탈춤 가락으로 몸의 유연성을 길러주자.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놀게 하고), 몸 놀리면(놀게 하면), 나중에 저절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제 손으로 마련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또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게 차 안 다니는 골목길을 늘려주자. 주말마다, 방학 때마다 산과 들과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자연이라는 큰 선생님들 손에 이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자.
곁들여 말하자면 내가 몸담고 있는 변산공동체는 아이들의 천국이다. 학교 갈 나이가 아닌 아이들에게 강제로 공부시키겠다고 대드는 아비 어미가 없다. 아이들은 산과 들과 물가에서 떼지어 논다. 이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 ‘강시’나 ‘좀비’ 흉내내다 몸도 마음도 굳어버릴까 걱정되어 초등교육도 마을 언니, 오빠, 아저씨, 이모, 고모, 삼촌, 엄마, 아빠, 중등과정 형들이 비와 바람과 흙과 햇살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리 손’ ‘우리 몸’으로 시킨다. 성과는? 아직 호언장담할 수 없지만, 책상머리에 세 시간 넘게 앉아있지 않아도 대학에 가고 싶은 녀석들은 다 제가 바라는 대학에 갔고, 딴 길 찾는 게 더 낫다고 여긴 녀석들은 줏대 있게 그 길을 걷고 있다. 무엇보다 이 아이들 얼굴에는 구김살이 없다.
구속받는 아이들에게 과연 창의력이 나올 수 있을까. 흔히 우리는 "학교 모범생이 사회 모범생이 된다는 보장은 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나밖에 모르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를 밝혀주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책임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경향신문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원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5021812265&;code=990000
‘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 ‘교실에 열 시간 앉아 있으면 살아있는 미라가 되지만, 그 시간 절반만이라도 쪼개서 도서관에 가 보고 싶은 책 마음대로 보면 강시나 좀비도 사람으로 되살아난다.’ ‘하루에 세 시간 이하만 학과공부 하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지만, 다섯 시간 이상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으면 십중팔구 떨어진다.’ ‘마음껏 뛰어놀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재잘대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쓰일 곳이 없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리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고, 머리만 굴리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내가 교육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학교 수업일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고, 아이들을 몇 달씩 산과 들과 바닷가에 풀어놓겠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도 학부모도 해방감을 만끽하고, 살아있는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하겠다.’ ‘지금 세상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그 탓은 죄다 잘못된 교육에 있다.’ ‘교육이 필요한 까닭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이웃과 오순도순 도와가면서 살 힘을 길러주려는 것인데, 부모도, 교사도 스스로 손발 놀리고 땀 흘려 일하는 본보기를 보이지 못하고, 도우면서 살아갈 길 대신에 남의 처지 돌아보지 말고 제 몸뚱이만 챙기라 부추기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아이들에게 살 길을 열어줄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 나는 입만 벙긋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말을 지껄인다. 사석, 공석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머리만 굴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마련할 수 있나? 없다. 손발 놀려야, 몸 놀려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배우고 있나? 어른들은 어디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 내가 보기에 온 세상 ‘학교’라는 곳 거의 다 이름만 학교지, ‘수용소’ ‘처형실’ 구실을 하고 있다. 가르침도, 배움도 없다. 이 일에 ‘대한민국’이 가장 앞장서고 있다. 이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나? ‘근거 없는 비방’이라는 소리 안 들으려면 그 까닭을 밝혀야겠지. 밝히지 뭐.
지금 이 나라 공교육, 사교육 현장에서 교육 종사자들이, 또 학부모들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몸 못 놀리게, 손발 못 놀리게 딱딱한 걸상에 열두 시간, 열여섯 시간 얼차려 자세로 묶어 놓고 머리만 굴리라고 강요하고 있다. 손발 묶는다는 게 뭔가? ‘강제 수용소’나 ‘감옥’에서조차도 중범자가 아니면 손발이 묶이지 않는다. 손발 놀리지 못하게 하고 몸 못 놀리게 하면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다. 죽은 목숨이다. 왜냐고? 손발 놀리고 몸 놀릴 수 있어야, 그러는 사람이 있어야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칩을 먹고 살 첨단과학 시대가 도래한다고? 그딴 것 석유나 석탄에서 죄다 뽑아낼 수 있다고? 그래도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새 세상’이 그렇게 해서 온다고? 제 정신인가?
산 사람의 손발을 묶고 몸 못 놀리게 만드는 것은 한마디로 사형선고다. 죽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집단 사형선고가 이른바 ‘교육현장’이라는 곳 도처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있다. 이건 교육학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처형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교육 아닌 교육 계속해서 시키면, 스스로 제 앞가림 할 수 있고 오순도순 서로 돕고 살아갈 힘 길러주지 않으면, 머지않아 ‘강시’로 ‘좀비’로 쏟아져 나와 이 세상을 아비규환 아수라장으로 바꾸어 놓을 게 불 보듯이 환하다.
하루에 세 시간 넘게 아이들을 교실 안에 가두어두지 말자. 도서관에서 저 보고 싶은 책 실컷 뒤지게 하고, 저 나름으로 삶에 필요한 정보 얻어서 그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동아리 모임을 갖게 하자. 학교 운동장이나 옥상이나 베란다 따위를 절반 이상 텃밭으로 바꾸자. 도시 학교에서는 그것만으로 몸놀림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 풍물이나 탈춤 가락으로 몸의 유연성을 길러주자.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놀게 하고), 몸 놀리면(놀게 하면), 나중에 저절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제 손으로 마련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또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게 차 안 다니는 골목길을 늘려주자. 주말마다, 방학 때마다 산과 들과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자연이라는 큰 선생님들 손에 이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자.
곁들여 말하자면 내가 몸담고 있는 변산공동체는 아이들의 천국이다. 학교 갈 나이가 아닌 아이들에게 강제로 공부시키겠다고 대드는 아비 어미가 없다. 아이들은 산과 들과 물가에서 떼지어 논다. 이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 ‘강시’나 ‘좀비’ 흉내내다 몸도 마음도 굳어버릴까 걱정되어 초등교육도 마을 언니, 오빠, 아저씨, 이모, 고모, 삼촌, 엄마, 아빠, 중등과정 형들이 비와 바람과 흙과 햇살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리 손’ ‘우리 몸’으로 시킨다. 성과는? 아직 호언장담할 수 없지만, 책상머리에 세 시간 넘게 앉아있지 않아도 대학에 가고 싶은 녀석들은 다 제가 바라는 대학에 갔고, 딴 길 찾는 게 더 낫다고 여긴 녀석들은 줏대 있게 그 길을 걷고 있다. 무엇보다 이 아이들 얼굴에는 구김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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