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2. 10:13ㆍReport/Martial Arts
신카게류 창시자 카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가 죽도를 개발했다. 이 당시 죽도는 후쿠로시나이(袋竹刀)라고 해서 대나무 하나를 중간까지만 세로로 넷으로 쪼개고 쪼갠 부분의 절반 길이를 다시 반으로 쪼개고 쪼갠 부분을 또다시 반으로 쪼갠 것을 소가죽 봉투에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진검과 다르다는 이유로 목검을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야규신음류, 마니와 넨류, 소야파일도류의 계보인 중서파일도류나 북진일도류 등등 여러 유파가 죽도를 사용한 게이코 훈련법을 받아들였다. 죽도 뿐만 아니라 직심영류(直心影流)에서는 몸을 보호하는 호구를 개량하여 도입하였고, 나카니시파 일도류에서 죽도와 호구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임에 따라 직접 치고 받는 훈련방식인 격검이 등장하였는데, 곧 에도시대에 널리 퍼져나갔다. 에도 막부말에는 커다란 규모의 유파들은 대부분 죽도와 호구를 사용했다. 죽도와 호구가 변화한 모양을 보면 검술보다는 창술용으로 쓰이던 것에 영향을 많이 받아 개량해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에도 막부가 몰락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폐도령(廃刀令)으로 정부에서 민간인의 도검소지를 제한했다. 진검을 사용하는 고류 검술계는 큰 타격을 입게 뎌었고, 먹고살 길이 없어진 이들은 대중들에게 격검 시합을 보여주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대회였던 격검흥행(撃剣興行)을 시작했다. 검술 애호가들이 죽도 격검을 수련하는 도장을 유치하면서 검술의 명맥이 간신히 이어졌다.
당시 죽도는 유파별로 각기 달랐다. 자연스럽게 죽도의 표준화가 이루어져 공정한 격검시합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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