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국학대학이 있었다

2024. 9. 8. 12:33Report/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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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출산 등으로 올해 147개 초등학교가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 학교 붕괴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특히 대학은 2024년 입시에서 교육대를 비롯해 국립대들도 신입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방 이후 여러 대학들이 국내에 설립되면서 5,16이후 군사정권이 시작되자 대종교계열의 대학들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어쩌면 우리가 만든 대학들이다. 지금의 인사동에 있는 천도교 건물 부근에서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국학대학이 있었다. 1929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보명의숙을 정봉현이 인수해 1933년 그의 장손과 형제들이 국학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은 것이다. 이 시기 최현배, 이극로, 양주동 등이 강의를 했고, 정인보는 한국학을 직접 강의했다.

 

1947년 11월 국학대학으로 승격하고 위당 정인보가 초대학장이 된다. 1962년에는 여자초급대학을 운영하다가, 1964년에는 초급대학으로 개편했고, 1967년에 국학대학 제17회, 국학대학 초급대학 제4회 졸업생을 끝으로 수도의과대학을 운영하던 우석학원으로 통합된다. 종합대학의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 지금의 전주와 진천의 우석대가 아님)를 준비하던 1965년 신문광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65년 5월 22일 촬영된 국학대학 신축 기공식의 영상을 보면, 이 시기 이미 대학을 확대하려는 계획이 실행되던 단계로 보인다. 우석대는 이전에 통합한 수도의과대학이 있었으나, 1971년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우석대도 의과대학을 탐하던 고려대에 통합되었다. 정릉에 있던 과거 고려대 병설보건전문대 자리가 서대문에서 정릉으로 이전한 국학대학 자리였다. 의과대학과 법대, 국학대 등을 모두 확보한 고려대는 국학대학의 흔적이 사라진지 오래다. 민족대학이 고려대라고 하는데 왜 민족대학이라 불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학대학에는 축구부가 명성을 날렸다. 1954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1960년 대학축구리그 우승을 하는 등 대학 축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야구부, 수영부, 레슬링부, 육상부 등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있었다. 특히 국학대학에는 초급대학 과정에 체육과가 있었다. 80명 정원으로 대부분이 선수로 활동했다. 이 체육과가 대학이 통합되면서 지금의 고려대 체육교육과가 만들어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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