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2. 21:54ㆍIn Life/世念
모교 동창회로부터 모교 80년사를 받았다. 검도부, 유도부, 축구부, 야구부, 배구부, 송구부, 체조부, 육상부 등 체육중고등학교를 방불케 했던 과거사가 눈에 들어 온다.
80년사에 없는 내용을 추가해 보면,
사립학교의 운동부는 19세말 유럽에서 시작된 '애슬레티시즘(Athleticism)'이 한국 사립학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명문사학만이 이 교육사조를 적용했다. 의식있는 설립자들은 영국 등의 교육방식을 고민한 것이다. 지금은 모교에 검도부와 야구부만 남았다. 전교생이 1인 1 무도와 선택운동을 하던 우리때와는 다르다. 학교의 의지가 강했던 과거와 달리 학부모의 의견이 커진듯 하다.
교훈은 "義에 살고 義에 죽자"다. 입학을 앞둔 예비소집때 본관에 씌여진 교훈을 보고 의아해 했다. 원래는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자"다. 학교에는 317학생의거 기념탑이 있다.
조선총독부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서울 이태원에서 출발한 성남학교는 지금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지역명 정책에 따라, 경성을 기준으로 성동, 성북, 성남, 성서로 불린 계기로, 경성의 남쪽 '성남城南'을 사용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남쪽 성남시의 성남과는 의미가 다르다.
설립자 김석원장군(625참전)은 친일인사로 등재돼 교내 있던 동상은 철거됐다. 김석원설립자는 대한제국 황실무관학교 마지막생도중 한명이었다. 마지막 무관생들은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고종의 명으로 일본의 육군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선 이들과 친일 부역으로 나아간 이들의 엇갈린 삶으로 갈라진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일본유년사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본의 한 식당 다락방에서 맺은 민족애에 대한 혈맹을 잊지 않는다.
그 중 김석원장군은 해방과 더불어 일본군복을 벗었으나, 625에 다시 참전한 후 군복을 벗었다. 자신은 일본군으로서 대한민국 군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그 후 성남학교를 일본유년사관학교를 능가하는 무관학교의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선배들은 성남학교를 예비사관학교를 꿈꾸었고, 교육수준도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사관학교를 가려면 성남고를 가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때도 교련수업이나 월요일 전교생 조회 분열식은 논산훈련소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군사정부시절의 교련수업이었지만, 학교설립배경에 따른 교련수업으로 수준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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