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예장동의 '예장'은 '무예장'의 약자다

2021. 1. 10. 07:09Report/City Mark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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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인 '예장'이 있던 남산 예장자락(옛 서울예대, 애니메이션, 안기부, 한옥마을이 있던 자리 ) 공원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됐던 곳으로 2만2833㎡ 규모로 조성된다.

 예장동은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예장(藝場)'이 있던 데서 비롯되었다. 무예장을 줄여 예장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청계천 이남 지역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변했다.

"임진왜란 때 한양에 주둔했던 일군(日軍)은 남산 기슭 예장(藝場)에 주둔했고 남산에 그들 나름대로 왜성도 쌓았다 한다. 1800년대 말 조선에 대한 발언권이 커진 일본은 곤도(近藤眞鋤) 대리공사를 앞세워 조선 정부로부터 진고개 일대에 대해 1885년 일본인 거류지역 허가를 얻어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군과 함께 일군은 이들 진압에 나섰으며, 이어서 조선의 패권을 청(淸)과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다음해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거류민 주거지를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이한성 동국대교수).

남산의 신궁과 신사의 건립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맞물려 진행됐다. 예장터와 그 주변 일대에는 일제의 각종 침략 기구들이 자리잡았었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 총본부라 할 일본공사관과 조선통감부도 예장동에 있었다.

이곳에 옛 중앙정보부가 공원 위쪽에 있었고, 조선총독부 관사 터의 기초 일부분을 그대로 보존한 '유구터'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 재산을 쏟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을 세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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