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읍성을 찾아라

2021. 1. 31. 09:02Report/City Mark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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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선 철도가 복원될 예정이다. 이 철도가 복원되면 가장 오래된 천년 도시 간성을 만나게 된다. 강원도 고성군에는 '간성(杆城)'이라는 지역이 있다. 역사가 오래된 지역임에도 주변 지역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익숙치 않다. 현재 고성군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휴전선 너머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남한의 강원도 고성군은 조선시대 고성군이 아니라 간성군이었다.


고구려의 수성군(䢘城郡),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守城郡), 995년(성종 14)삭방도(朔方道)의 간성군, 1018년(현종 9) 간성현, 뒤에 군으로 복구되어 고성(高城)도 겸임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간성군으로 500년간 거의 변동이 없다가, 1914년 고성군을 합쳐 새로운 간성군, 1919년고성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79년 간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간성은 고성과 함께 합쳤다 분리되었다를 반복했던 지역이다.

과거 기록의 많은 것들이 군사지역 등의 이유로 방치되거나 복원되지 못한 유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간성 읍성(邑城)이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을 복원한다면 간성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간성읍성은 다음과같이 설명하고 있다.

석성(石城)의 둘레가 2백 95보이요, 토성(土城)은 86보이다. 옛 성산 석성(城山石城)이 군의 남쪽에 있다. 둘레가 1천 1백 40보이며, 안에 작은 샘이 하나, 작은 못이 하나 있는데, 크게 가물면 마른다.

周回石城二百九十五步, 土城八十六步。 古城山石城, 在郡南。周回一千一百四十步, 內有小泉一、小池一, 大旱渴. (태백산사고본, 57책 153권 12장)


이 읍성은 언제 누가 지었을까? 1451년(문종 1년)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강원도 감사는 강원도 각 고을에 읍성을 수측하도록 청했다.

간성 읍성(杆城邑城) 둘레 2천 7백 9척은 본군과 홍천(洪川)·횡성(橫城)의 군인 1천 14명으로써 역사하게 하며, 고성 읍성(高城邑城) 둘레 2천 2백 13척은 본군과 춘천(春川)·양구(楊口)·인제(麟蹄)의 군인 1천 5백 91명으로써 역사하게 하되, 모두 20일로 한정하여 쌓게 하고, 높이는 혹은 10여 척, 혹은 7, 8척, 혹은 5, 6척으로 하소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문화재관리국(1977)의 기록중 강릉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조사한 기록에도 잘 나와 있다.

옛 간성군의 치소성(治所城) 역할을 했던 읍성으로 동문과 서문지 역은 7번 국도가 지나고 있고 내부에는 군청 건물과 간성읍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군의 주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성벽은 동벽 지역, 즉 간성교회 지역에서 북쪽으로 간성시장 뒷편 주차장 까지의 부분 약 200m 가량이 절단되어 사라졌다. 간성교회 부근의 단애부에서 보이는 성벽의 모습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성토, 보축하 여 이용하였으며, 외곽 쪽으로는 일부 석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 고 있다. 성의 높이는 약 6-7m정도이다. 이 단애부에서 현재 간성읍 사무소 뒷편까지의 남벽 잔존부에 대한 길이를 실측한 결과, 일부 가 도로로 멸실되긴 하였지만 약 250m 가량은 그런대로 성벽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남벽의 정상부에는 간성 제일교회와 민가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성군에서 건립한 '간성읍 성'이라는 표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부는 마사토 채취를 위해 인위적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남벽은 서벽 쪽으로 돌아 현재 고성 천주교회 있는 곳에서 끝나고 있다. 이 성당과 민가들이 정상부를 평탄화시키고 있어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서문 쪽에 서 이어지는 서벽과 북벽은 대부분 훼손되었고, 특히 고성군청 뒷 부분은 주차장 공사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일부 단애부에서 토석혼축의 판축흔이 매우 잘 남아 있다. 판축은 자연의 구릉 위에 약 2m 높이로 이루어졌다. 성벽의 윗부분은 모두 기와 조각과 흙으로 쌓 여 있는데 보축시에 기와와 흙을 혼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 의 북벽 일부와 동벽의 일부에는 외벽과 정상부가 100m가량 잘 남 아 있다. 동벽 일부 즉 평지 쪽으로 내려오는 부위에는 석축이 일 부 남아 있다. 화강암류의 암괴로 치석하지 않고 외벽 쪽으로 평평 한 면이 나오도록 하여 쌓았는데 길이 약 10m, 높이 약 2m정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2,565척(777m), 높 이 13척(3m)의 석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번 조사 결과 둘레 길 이는 대체로 유사하였으나, 석축 뿐 아니라 토축도 이루어졌던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보면 읍성은 5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읍성을 쌓는 자리는 이미 성이 있던 자리가 많았다. 간성읍성자리도 간성이 오랜 역사가 있었던 만큼 그 이전의 성(城)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간성읍성 추정(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후기 지방지도중 간성지도중에서)

 

간성읍성터위의 삿갓소나무(고성군청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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