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北學議

2020. 7. 25. 15:14Report/City Mark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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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모습. 과천문화원 소장.



박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학의(北學議)'는 채제공의 도움으로 첫 연행길에 오를 수 있었던 1778년(정조) 9월 29일에 완성되었다. '북학의'의 ‘북학’이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그렇게 된 원인은 우물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누구나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그는 시대를 앞서갔고, 그 때문에 고독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인물이다.

서얼출신으로 박제가가 학자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어머니 외에 장인인 이관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충무공의 5대손이었던 이관상은 박제가를 보자마자 맘에 들어 사위로 삼았다. 장인과 사위는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했고 서로 닮아 뜻이 잘 맞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우한 서자 출신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767년 이후 박제가를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 서얼 출신 문인이 주동이 되어 ‘백탑시파(白塔詩派)’라는 문학동인 모임이 결성되었다. 백탑은 북학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서울 대사동(大寺洞- 현재의 인사동 일대) 원각사 절터에 10층 석탑이 있었는데, 당시 이것을 ‘백탑’이라 불렀다.

박제가는 실학자 중에서 청나라를 가장 사랑한 인물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당벽(唐壁)’이라 조롱했지만, 청나라 문인들은 그를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평가할 뿐 출신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었다.

답답한 조선의 현실을 떠나 중국으로 간 박제가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조선후기 실학자 가운데 중국을 가장 많이 다녀 온 인물이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모두 네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첫 번째 연행 때는 관직 없이 종사관의 신분으로 갔었지만, 두 번째 연행 때부터는 관직에 있으면서 공식적으로 중국 사절단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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