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0. 16:57ㆍReport/Martial Arts
“매년 일정한 시기에 관청의 허가를 받고 약 3일 동안 읍내와 시골 사람들 사이에 석전이 벌어진다. 만약 사람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사고로 여기고 관청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번은 나의 통역자인 김씨가 머리에 돌을 맞아 두 달 동안 몸져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의 두개골에는 아직도 크게 움푹 패인 자국이 남아 있다.”
19세기말 영국 외교관이었던 칼스(W. R. Carles)가 수집한 한반도 지역정보의 분석을 다룬 ‘조선풍물지(Life in Corea)’에 나온 이야기다. 석전(石戰)이라고 하면 해방이후 각종 집회에서 시위대가 경찰과 상대한 투석전을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석전이 우리나라에서는 전쟁기술이기도 하였고, 세시풍속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돌을 무기로 사용했던 원시전쟁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편전, 변전, 편싸움, 편쌈
석전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 돌을 던져 싸우는 패싸움이었다. 그래서 문헌에는 ‘편전(便戰)’이나 ‘변전(邊戰)’으로 남아 있고, 우리말로는 ‘편싸움’이나 ‘편쌈’으로 불렀다. 좀 더 역사를 올라가 보면 석전은 중국과 일본 등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문화였지만 유독 우리나라의 규모는 컸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일본 역사학자들에게는 독특한 문화로 인식되었다.
석전은 원시의 투석(投石)전법이 고대에 실전 연습을 위한 연중행사로 변하였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일반의 민속활동으로 확산된 원시 전쟁의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석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수서(隋書)’ 동이전 고구려조의 기록이다. “매년 초 패수(대동강)에 모여서 놀 때, 왕은 가마를 타고 의장을 벌려 세우고 놀이를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은 옷을 입은 채로 강물 속에 들어가 신하들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물을 끼얹고 돌을 던져가며 소리 지르고 달리고 쫓고 하는 놀이를 두세 번 하고 그친다.” 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고구려의 편싸움은 국가적인 행사의 하나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존 본능에서 시작된 놀이가 국가가 형성되면서 종교적 제의로써 그 기능이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전부대에서 세시풍속으로 변용
고려시대에는 석전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오며, 정규 전투부대의 석투군(石投軍)의 연습에 대한 기록과 단오때의 석전기록 등이 있다. 조선에서는 태조, 세종, 예종때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종 원년의 기록에 보면 중단되었던 석전이 정식으로 부활되었던 기록이 있다.
석전은 조선 초기 태조에 의해 정규 군부대로 창설되었고, 민속경기로 대중화된 석전이 국가의 정책적인 폐지 이후에 다양한 세시풍속들로 변용된 것이다. 조선 초기 석전은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제도였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태조는 전쟁을 위한 무재(武才)로써 석전부대인 척석군(擲石軍)을 창설하였으며, 더불어 민속놀이로서 유희적 요소를 갖추어갔다. 척석군은 중추(中樞) 관리 하에 편성하였다. 세종 9년에 이르러 석전은 체계화된 형태를 갖추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의 활쏘기와 함께 지역 방위를 위한 공성전 수단으로 많이 활용된 것이 석전이었고,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같은 주요 전쟁에서 투석이 중요한 무기였다. 이러한 석전은 민중들에게는 세시풍속으로 남으면서 변용되었다.
근대 석전의 모습은 고종때 선교사나 외교관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구한말 한번 석전이 시작되면 쉽게 끝나는지 않았다. 돌과 몽둥이 들고 맞붙어 한쪽이라도 물러나야 끝났다. 석전이 길어지면 택견이나 씨름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만리동 고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것이 가장 유명한 석전이었는데 참여인원만 9천여명에 이르고 구경꾼도 수만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0년에 들어서 일제는 강제로 못하게 함으로써 중단된 이후 많이 줄어들었지만 1960년대까지 동지와 단오에 마을단위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동안 연구물들은 석전이 의례, 군사훈련, 스포츠, 그리고 인기 있는 여가활동 등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석전은 전근대 시기의 다른 폭력 형태들과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스포츠로 분류될 수 있는지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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