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최홍희의 태권도헤게모니

2019. 9. 30. 19:47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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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안다손 사범은 태권도복을 입은 채 '태권도사범 마이클 안다손'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연도에서 박 대통령을 환영했다. 

최홍희에게는 반전이 이루어진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럽국가 첫 방문지로 1964년 12월 7일 서독을 방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8일에 뤼프케 대통령, 9일에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방문했을 때 마이클 안다손 사범은 태권도복을 입은 채 '태권도사범 마이클 안다손'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연도에서 박 대통령을 환영했다. 이를 본 박대통령은 감명을 받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 후 박대통령은 태권도 사범 해외사절단을 지시했고, 사절단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의 시범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정부의 관심 속에 진행된 태권도 세계화의 첫걸음이다. 이에 힘을 받은 최홍희 장군은 자신이 만든 '태권도'라는 이름을 사용해 1965년 대한태수도협회는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했다. 그리고 1965년 2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같은해 3월부터 아프리카 18개국을 순방할 태권도사절단 파견을 의결했다. 당시 단장에는 당시 말레이시아 대사를 맡고 있던 최홍희를 임명하고,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를 순회하며 시범하게 됐다. 이러한 순회시범 이후 최홍희는 태권도의 국제기구 설립을 추진한다.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하고, 당시 정치적인 실력자였던 김종필을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최홍희가 총재를 맡았다.

세계화를 위한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세계화의 첫걸음을 시작했지만, 국내 기간도장들이 모여 만들어진 대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과 갈등이 시작됐다. 문제는 ITF가 대한태권도협회(KTA)의 동의 없이 명의를 도용하고 최홍희 자신이 말레이시아 대사로 재직하던 당시 친분이 있었던 말레이시아 문교상인 '조하리'와 5개의 외국인 자리를 비워둔 채 집행부를 한국인으로만 구성해 국제단체조직의 공익성에 위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시작되자 대한체육회와 문교부는 체육단체 일원화를 위한 두 단체의 통합을 종용했으나 쉽지 않았다. 결국 대한태권도협회는 1968년 8월 28일 가맹단체인 ITF를 제명시키고, 협회 산하에 '국제위원회'를 신설해 모든 국제 업무와 해외에 파견도장을 자체 내에서 관장키로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립양상을 지속하자 당시 대한체육회 민관식 회장은 두 단체간 업무관계가 중복성이 많고 뚜렷하지 않아 분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해 대한태권도협회와 ITF 간의 업무한계를 규정하기도 했다. 당시 ITF는 1968년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홍콩에서 개최했고, 제2회 대회는 1971년 3월 말레이시아에서 개최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할 때였다.

대한체육회가 다시 중재하기 시작했다. 대한체육회 4명, ITF와 대한태권도협회 각 2명씩 4명, 전체 8명이 수습위원회를 만들어 타협점을 만들어 가려 했다. 그러나 1971년 8월에 소집된 전체회의에서 불만을 품은 최홍희가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남으로써 수습위원회는 해체됐다. 그 이유는 해외사범 파견문제를 놓고 ITF와 대한태권도협회간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에는 청와대가 있었다는게 최근 학계의 주장이 나왔다. 경호실 출신의 김운용은 박 대통령의 지시로 태권도협회 회장에 임명된 뒤 ITF 운영에 협조하지 않고 갈등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홍희가 수습위원회에서 탈퇴하자, 김운용 체제로 돌아선 대한태권도협회는 세를 규합하고 중앙도장(현 국기원) 설립에 대해 정부에 요청하면서 조직의 응집력을 만들어냈다. 최홍희는 군대 후임이던 박정희대통령과 갈등이 가속화되면서 결국 1972년 캐나다 토론토로 망명을 하게 되고 ITF본부도 캐나다로 이전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최홍희와 당시 박정희 정부와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최홍희와 박정희는 어떤 관계였을까? 둘의 관계는 시작부터 달랐다. 최홍희는 일본 유학시절 징용되어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하다 평양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사에 편입해 관동군 소위가 되어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군인시절 최홍희가 박정희보다 계급이 높았으나, 516 군사쿠테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최홍희는 박정희에게 군사쿠테타와 그의 대통령선거 등에 대해 불만을 직설적으로 박정희에게 표시했고, 박정희는 늘 그런 최홍희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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