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과 무(武)

2019. 9. 30. 19:36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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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兩班)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합친 의미다. 엄밀하게 보면, 양반은 원래 문(文)과 무(武)를 포함한 사회계층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수많은 의병장들은 양반출신인 사대부출신들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검(劍)을 휴대하고 다녔다는 기록도 그렇고 이름있는 사대부집안에 가보로 내려오던 것 중 하나가 검이 있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무경(武經)'은 무(武)의 근본을 형성하는 학문이었다. 무관은 평소 '무경'을 강독하여 마음을 교화시키고, 국가는 강습을 제도화하여 무관의 자질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무경'의 강독과 강습은 무관의 자질을 시험하는 강경(講經)과 강서(講書)의 제도로 확립되었다. 무관의 경서로 지칭되는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육도'와 '삼략', '손자', '오자', '위료자', '이위공문대'를 시험하였으며, 군의 운용과 전쟁에 필요한 병법서를 시험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문과 무를 문무일체, 문무겸비, 문무겸전의 사상을 중요시하였다. 문과 무는 수레의 두 바퀴, 새의 양 날개와 같다고 보았다. 임금의 치도(治道) 역시 문(文)과 무(武)의 양 날개를 편중하지 않는 문문일체를 중요시 했다. 또한, 무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문무겸비(文武兼備)를 통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이었다. 즉 무관들은 '사서삼경'을 통해 민본(民本)의 근본을 알고,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통해 그 자질을 교화시켰으며, 병학(兵學)은 군의 운용과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습득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관에게는 무예 능력을 우선하였고, 학문은 무덕(武德)을 추구하는 무학의 학문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또 일본의 무사도와 같이 주군(主君) 또는 군주(君主)를 위한 맹목적인 사상의 가치를 형성하기 보다는 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유가의 인(仁)을 근본으로 하였다.

원래 우리 선비들은 무예와 학문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관들은 스스로 글만 읽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에 대한 천시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토이다. 또한 전국에 사설교육기관인 서당이 들어서면서 문(文)에 치중하게 됐다. 과거 급제가 가문의 체통을 세워준다고 보았다. 특히 사교육으로 만들어낸 문과 급제자들은 비정기적으로 치러진 무과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들은 왕권중심의 정세에 타협했고, 정권역시 무를 천시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세뇌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권보다는 신권(臣權)이 강해지고, 신권의 주류가 문관이 되었다. 결국 문관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무(武)를 천시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성호 이익은 고급무관을 양성하여 문관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문무무구(文武無拘)'의 인재등용으로 무관의 위상을 높이고 강력한 무비의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무과의 개선과 문과 중심이던 성균관에 무학을 창설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평가를 통해 인재를 배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성균관의 문묘 역할을 하는 무성왕묘 설치는 무관들도 배향 의식을 통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이는 무를 천시하는 사조를 극복하고 무관에 대한 인식과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이었다.

최근 무예계에서는 3·1운동 100년을 돌아보며 문존무비(文尊武卑)로 인해 지배당한 아픈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얼핏 무는 힘을 기른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무적 능력은 신체와 정신을 수양하며 문적 향상을 도모하는 본체로 보아야 한다. 최근 일부 명문사학들이 스포츠나 무예를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하거나 서구사회에서 무예 유단자를 상징하는 블랙밸트(검은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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