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유술이 있었다고?

2020. 7. 28. 17:10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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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 조선시대에 유술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유도사 연구자들의 연구물에 간혹 등장하는데, 갑사들이 ‘유술(柔術)’과 유사한 맨손기술이 있었을 것이라는 일부 연구자들의 이야기가 설득력은 더 있을 것이다. '유술'이라는 명칭이 정확히 있었다면, 무예도보통지에도 거론되었을 것이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도 등장할 법하다. 심지어 훈련도감의 교육방식에도 그렇다.
훈련도감에서 맨곤무예는 누가 담당했을까? 살수였을것이다. 살수의 주무기는 검술이었다. 당시 맨손무예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연구는 기효신서의 권법이다. 이 권법은 명나라 무예교관들이 지도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단 한번 유술이 검색된다. 나온다. 그것도 1906년 일본의 유술과 격검을 이야기할 때 나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옥헌에서 회환 대사를 소견할 때 비서감 승 윤덕영 등이 입시하여 일본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고종43년 1906년 1월 16일)

丙午正月十六日亥時, 上御漱玉軒。 回還大使入侍時, 秘書丞尹悳榮, 秘書郞金鶴秀·李文求, 回還大使李載完, 以次進伏訖。 上曰, 史官分左右。 仍命大使進前, 載完進前奏曰, 歲後日氣隆寒, 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 載完曰, 寢睡·水刺之節, 何如? 上曰, 一樣矣。 載完曰, 太子宮氣候, 若何? 上曰, 平順矣。 載完曰, 臣承命前往日本國, 奉呈國書, 今十一日自東京復路, 今日入城矣。 上曰, 當此寒節, 海陸遠程, 善爲往還耶? 載完曰, 皇靈攸曁, 一行無事往返矣。 上曰, 幾次見日皇, 接待果何如耶? 載完曰, 一次晉接, 仍陪食, 接伴官二員, 輪回來留, 大抵外樣形式, 頗款待矣。 上曰, 遊覽爲幾處乎? 載完曰, 臣意, 始擬持重自居, 不欲私行觀覽, 而其俗專在誇張, 務欲一一來玩, 接伴官式日苦懇, 又或稱奉勅, 不得已試往觀覽, 爲六七處矣。 上曰, 淸國大使, 時適到京云, 果然耶? 載完曰, 淸國大使貝子載澤, 先臣一日到東京矣。 上曰, 卿住東京, 爲幾日乎? 載完曰, 首尾爲十一日矣。 上曰, 凱旋將卒, 皆已還國否? 載完曰, 姑未盡數還到, 方以船以車, 陸續入來, 來輒設宴以勞之, 畢還之期, 在於陽曆四月云矣。 臣觀其國境土, 比我國, 雖曰稍大, 亦不過一海外小島也。 近以富强, 稱於列國者, 無他, 全國男女長幼, 勤於事務, 晝夜不怠, 此其爲開明之要旨, 而我國亦一心勉勵, 以勤爲主則進步發達, 指日可期也。 上曰, 治國之道, 莫先於勤孜, 國無遊衣遊食之民, 進進不已, 發達擴張, 則何患乎不爲富强, 而鼓動民心, 興學校爲本矣。 載完曰, 觀其學校, 則女子亦爲體操, 而男子則體操外, 又有柔術擊劍之技矣。 上曰, 擊劍之術, 何如? 載完曰, 如我國便戰樣, 其危凜則過矣。 上曰, 皇后·皇太子, 皆得見之乎? 載完曰, 皇后·皇太子, 適在他所數百里外, 未得接見矣。 上曰, 回還大使就座。 仍命史官就座, 又命大使先退。 仍命退, 丞·史, 以次退出。

 상이 수옥헌(漱玉軒)에 나아갔다. 회환 대사(回還大使)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감 승 윤덕영(尹悳榮), 비서감 낭 김학수(金鶴秀)ㆍ이문구(李文求), 회환 대사 이재완(李載完)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대사에게 앞으로 나아오라고 명하니, 이재완이 앞으로 나아와 아뢰기를,

“설이 지난 뒤 날씨가 매우 추운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재완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재완이 아뢰기를,

“태자궁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순(平順)하다.”

하였다. 이재완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일본으로 가서 국서(國書)를 받들어 올린 다음, 이달 11일 동경(東京)에서 출발하여 오늘 도성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추운 계절에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먼 길이었는데, 잘 다녀왔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황령(皇靈)이 미친 덕분에 일행이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몇 번이나 일본 천황을 만났으며, 접대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한 번 나아가 만난 다음 배식(陪食)하였으며, 접반관(接伴官) 2원(員)이 돌아가며 와서 머물렀습니다. 대체로 겉으로는 자못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람(遊覽)은 몇 군데나 해 보았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진중하게 자처하고자 하여 사사로이 다니며 관람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그들의 습속이 오로지 과장(誇張)하는 데 있어 일일이 와서 보기를 애원하였으며, 접반관이 날마다 간청하는 데다가 또 칙명을 받았다고 일컫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험 삼아 가서 관람한 곳이 예닐곱 군데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국(淸國)의 대사(大使)가 때마침 동경에 도착하였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청국의 대사 패자(貝子) 재택(載澤)이 신보다 하루 먼저 동경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동경에 머무른 것이 며칠이었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도합 11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선하는 장수와 군졸들은 모두 이미 환국(還國)하였던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아직 전부 돌아오지는 못했고 한창 배나 기차로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 오는 즉시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습니다. 양력 4월까지 다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그 나라의 영토가 우리나라에 비해 비록 조금 크다고는 하지만, 역시 해외(海外)의 작은 섬에 불과하였습니다. 최근에 부강하다고 열국(列國)에 일컬어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국의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사무에 부지런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그들이 개명(開明)하게 된 요지(要旨)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마음으로 전력하여 부지런함을 위주로 한다면 진보와 발달은 단시일에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부지런히 힘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나라에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백성들이 없어서 끊임없이 전진하여 발달하고 확장해 나간다면 부강해지지 않음을 어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 진작시키는 데에는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근본일 것이다.”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학교를 보니, 여자들도 체조를 하였고, 남자들에게는 체조 외에 또 유술(柔術)과 격검(擊劍)의 재주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격검의 기술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편싸움하는 모양과 비슷하나, 위험스러운 정도는 더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후와 황태자도 모두 만나 보았는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황후와 황태자는 마침 수백 리 밖 다른 곳에 있어서 접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회환 대사는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대사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丞)과 사관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조선왕조실록 고종43년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제47권, 고종43년(1906)

召見回還大使完順君 李載完。 載完曰: "臣承命前往日本國, 奉呈國書, 今十一日, 自東京復路, 今日入城矣。" 上曰: "幾次見日皇, 接待果何如耶?" 載完曰: "一次晉接, 仍陪食, 接件官二員, 輪回來留。 大抵外樣頗款待矣。" 上曰: "凱旋將卒, 皆已還國否?" 載完曰: "姑未盡數還到, 方以船以車, 陸續入來, 來輒設宴以勞之。 畢還之期, 在於陽曆四月云矣。 臣觀其國境土, 比我國雖曰稍大, 亦不過一海外小島, 而近以富强, 稱於列國者, 無他。 全國男女長幼, 勤於事務, 盡夜不怠, 此其爲開明之要旨。 而我國亦一心勉勵, 以勤爲主, 則進步發達, 指日可期也。" 上曰: "治國之道, 莫先於勤孜。 國無遊衣遊食之民, 進進不已, 發達擴張, 則何患乎不爲富强? 而鼓動民心, 興學校爲本矣。" 載完曰: "觀其學校, 則女子亦爲體操, 而男子則體操外, 又有柔術、擊劍之技矣。"

귀국한 대사(大使)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재완이 아뢰기를,

"신이 폐하의 명령을 받고 일본에 가서 국서를 봉정(奉呈)하고 음력으로 이달 11일에 동경을 떠나 오늘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본 천황을 몇 번이나 만나보았으며, 접대는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한번 접견하였는데 같이 모시고 식사하였으며 접반관(接伴官) 2원(員)이 교대로 와있었습니다. 대체로 겉보기에는 상당히 환대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선하는 장수와 군사들은 다 귀국하였던가?"

하니, 이재완이 아뢰기를,

"아직 전부 돌아오지는 못했고 한창 배와 차로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도착하는 즉시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려 하는데, 양력 4월까지 다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그 나라의 영토가 우리나라보다 조금 크다고는 하지만 역시 바다 밖의 한 작은 섬에 불과한데, 최근에 여러 나라들에게 부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온 나라의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니, 이것이 그들이 개명(開明)하게 된 중요한 원인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심으로 전력하여 근면을 위주로 한다면 진보와 발전은 머지않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도는 부지런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나라에 놀고먹는 백성들이 없이 끊임없이 전진하고 발전시켜 확대해 나간다면 어찌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하고 진작시키는 데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근본이다."

하였다. 이재완이 아뢰기를,

"학교를 보았는데 여자들도 체조를 하며 남자들은 체조 외에 또 유술(柔術)과 격검(擊劍)하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안자산의 조선무사영웅전 

그러나 안자산의 ‘조선무사영웅전’ 제2지 무예고편에 유술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유술의 시초가 고려중기라고 하고 있다. 충혜왕때 유술이 흥행했다고 하는데 유도라는 표현도 쓰며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안자산이 유술을 수박희나 권법을 동일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유술과 유도와는 다른데도 무예인이라기 보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동일하게 생각할 수 도 있다. 그가 택견까지도 유술과 동일하게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유술이라고 하는 삽화역시 무예도보통지의 권법편이다.

......

위 글은 대한유술연맹의 '조선유술'과는 상관 없으니 일부 무예관계자들은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대한유술연맹은 일본강도관 조선지부로 통합되기 이전 일본유학파가 아닌 국내에서 수련되어진 유술을 연구하고 수련내용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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