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6. 09:44ㆍReport/Martial Arts
1939년 1월 3일 동아일보 11면에 나오 광고다. 조선고유동경기의 현대화,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각계인사의 제언이라고 올렸다. 당시는 중일전쟁이후 1939년 국민징용이 시작되고, 같은해 5월 12일에는 체육단체를 전면통제하며 일본이 국방체육으로 전환하던 시기다. 이 당시 학교체육역시 공작교육으로 전환되면서 전쟁에 협력하는 체계를 갖춘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활쏘기를 부각시킨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고려시대의 궁술명인으로 문종, 예종, 의종, 김윤후, 한희윤, 정지, 원순제, 황상을 들었고, 조선시대에는 기사의 첮재로 이태조, 태종, 세조가 있었으며, 명궁으로는 최윤덕 김덕생, 이징록, 어유소, 김세적, 이순신, 김여물, 황진, 정발, 장응기, 신호, 임정식, 홍계남, 신정 등이 있으며, 인조때는 노지사, 철종때는 최길진, 권대규, 배익환, 고종때는 안택순, 박인회, 양기환, 정행렬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외에도 활쏘기를 통한 인재 등용의 이야기까지 함께 실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후로 국제스포츠의 눈을 뜨기시작했고, 당시 일본의 무도역시 해외로 전파되는 과정을 본 각계인사들이 우리 전통스포츠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활쏘기의 경우, 일본의 큐도경기에 조선의 각궁이 포함된 이후라는 점에서 우리민족의 활쏘기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 양궁이 도입된 이후로 활쏘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 씨름의 경우도 많은 씨름인들이 유도로 전향해 우수한 실력을 발휘했고, 레슬링으로도 전향해 충분히 실력을 발휘한 시기라는 점에서 우리 씨름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당시의 관점으로만 보아도, 씨름과 활쏘기는 전통무예로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전통무예진흥법'에 의한 진흥사업의 전통무예종목 지정에 최우선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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