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시험장, 융문당과 융무당

2019. 7. 6. 14:09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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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경북궁에는 509동의 건축물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초 40여동밖에 남지 않았다. 469동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는 이 건축물들을 경매로 내놓아 요정이나 일본인들의 저택 용도로 반출되었다. 일제는 이 건축물들은 팔아 넘기고 조선의 궁에서 온갖 박람회와 대규모 행사를 했고,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을 했다.
그 중에서 융문당과 융무당은 식년문무과전시, 정시, 알성시 등 과거시험을 보는 곳이었으며, 앞에 있는 넓은 마당은 임금이 군대사열을 받고, 군사조련,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던 곳이었다. 이 두 건축물중 융문당은 남향, 융무당은 서향을 바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건축물은 용산에 있던 일본사찰이었던 고야산 용광사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로 옮겨져 전몰일본병사들의 남골당으로 사용되었다.
해방이 되고, 이 두 건축물은 원불교 서울교당으로 사용되어졌고, 융문당은 대각전인 법당으로, 융무당은 대각사로 생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6년 전남 영광으로 이전되어 원불교 창립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두 건축물의 사연과 더불어 문화재 등록 고시가 있었ㅇ나, 원불교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관계로, 소유자측의 반대로 문화재 등록이 무산된 바 있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근대 무예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무대 무도도장이 여기에 있었다.
#융문당 #융무당 #경무대

*경무대는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의 후원(後苑) 지역을 말하는 명칭이다. 일제강점기에서는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되어 운동회와 각종 집회나 행사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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