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선생과 무예
2022. 6. 28. 11:24ㆍ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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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선생은 서구스포츠뿐만 아니라, YMCA에 유도와 검도를 보급한 인물이다. 당시 스포츠-체육 활동은 독립과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의 역할을 했다.
1909년 ‘유술부’가 창설될 때 초대 한국인 총무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장사 100명만 양성하면 나라에 대하여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원한 청년’으로 불릴 만큼 에너지가 넘쳤던 선생은 체육이 민족의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고종왕실무관학교의 유능한 사범들과 당시 인재로 불리던 유학출신들을 YMCA지도자로 채용하고 아낌없는 애정을 주지만, 그들은 밀정이 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상재선생의 사후에 더욱 날개를 단듯 활개를 치고 다녔다.
1914년 이상재선생은 전국 기독교 청년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사 사장을 역임한 영원한 청년 이상재는 1927년 신간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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