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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설립과 유도원 신축공사의 대립
한편,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정부는 체육단체의 법인화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정부는 자체기금 10억 이상을 확보하고 재정자립도가 50%를 웃도는 단체를 법인화한다는 계획을 세웠왔다. 그러나 이에 해당되는 체육회 가맹단체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만, 유도회는 여의도 유도회관의 자산가치 때문에 1차법인화 대상이었으나 통합결렬로 기금비축이나 재정자립도를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9월에 유도원 신축공사 입찰이 시작된다. 럭키, 우성, 대림 3개사가 참가한 가운데 신축공사 입찰을 시작했으나 대금지불조건 등으로 유찰된다. 그 뒤 또 유찰되고 제3차에서 응찰회사 5개사 중 신우건설이 1백39억 6천만원에 낙찰된다. 당시 도급순위 220위의 중견업체인 신우건설과 1주일 이내에 계약을 체결키로 함으로써 신축공사를 강행했다. 두 차례의 유찰에 마음을 놓고 있던 유도회측은 이날 낙찰 소식이 전해지자 놀라게 된다.
공사대금을 스포츠센터 회원권 판매(1구좌당 1천만원)와 사무실 임대비로 충당하겠다는 유도원측의 계획이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으로 공사비 결제에 차질을 빚을 경우 전체 유도인의 자산인 유도회관 부지를 모두 날릴 수도 있다고 지적해 왔었다.
유도원은 유도회의 양단체 통합제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해 온 신축공사는 전 유도인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유도원 이사진과 일부 원로 유도인들 만으로 추진돼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도계는 유도회에 대한 재정지원과 유망주들의 장학금 지급, 유도인의 후생복지 등을 내세운 공사목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유도원은 1992년 12월 3일 ‘여의도종합스포츠센터' 기공식을 갖는다. 유도원측의 본격적인 실력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유도원측은 1993년 유임의사를 밝힌 박용성회장을 자진사퇴시키기 위해 유도원을 중심으로 한 원로급 유도인과 서울, 경북, 경남을 주축으로 하는 대의원들이 힘을 모은 새회장 추대설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총회막판까지 회장후보를 추천하지 못하고 박회장은 다시 만장일치로 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이 총회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유도회와 유도원의 대립이자 야심 있는 소장파와 욕심 많은 원로들의 대결양상을 띠는 유도계의 치부라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원과 유도회는 별개의 단체로 1994년과 1995년을 보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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