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골퍼는 세종대왕인가?

2025. 7. 6. 13:52Report/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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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서구스포츠라고? 우리나라 최초의 골퍼는 세종대왕이라고?

골프와 유사한 전통놀이가 이미 중국과 우리나라에 있었다. 그림은 추환도벽화다. 원나라때의 것으로 용인대 무도연구소시절 골프사를 정리하던중 2001년도에 접한 그림이다. 추환도를 보면, 언덕에서 요즘으로 말하는 해저드에 해당하는 냇물이 있고, 네명의 남자가 경기를 펼치는 장면이 요즘 골프와 흡사하다. 중요한것은 홀에 공을 넣는다는것이고, 다양한 채가 있다는것이 이채롭다. 중국골프협회에서는 추환채를 복원해 제시하기도 했다.

한 언론에서는 스터디모임인 체육사상연구회를 주도하셨던, 이진수 한양대 교수님은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돼 골프와 비슷한 '봉희(棒戱)'이라고 불리었다고 주장한바 있다. 그 근거로, 세종 3년(1421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라며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편을 갈라서 승부한다. 채는 숟갈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두꺼운 대나무를 물소가죽으로 싸서 자루를 만든다. 구의 크기는 달걀만하고, 마뇌나 나무로 만든다. 땅에다 주발만한 구멍을 파고 무릎을 꿇거나 서서 공을 친다. 공이 굴러서 구멍 가까이 이를수록 좋고,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다.

 

이쯤되면 세종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골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언론보도는 오류다.  위 조선왕조실록은 잘못된 자료다. 위 내용은 세조의 기록과 가깝다. 세종때는 타구나 격방으로 나오고, 봉희는 세조때  나온다.  세조실록2권, 세조 1년(1455) 9월 8일에는,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활 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사정전(思政殿)에 임어하여 종친(宗親)들의 봉희(棒戲)를 관람하였다. 봉희(棒戲) 를 혹은 격구(擊毬)라고도 한다. 격구하는 법은 혹은 수인(數人), 혹은 십여 인, 혹은 수십 인이 좌우로 나누어서 승부(勝負)를 겨루는데, 봉(棒)의 모양은 숟가락(匙]) 같고 크기는 손바닥(掌)과 같은데, 수우피(水牛皮)로 만든다. 두터운 대나무를 합하여 자루를 만드는데 봉피(棒皮)가 얇으면 구(毬)가 높이 솟고 봉피가 두터우면 구가 높이 솟지 않는다. 또 곤봉(袞棒)이란 것이 있는데, 친 구(毬)가 구르고 일어나지 않으며, 그 후박(厚薄)과 대소에 따라 그 명칭이 각기 다르다. 구는 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혹은 마노(碼碯)도 쓰며 크기는 계란(鷄卵)만 하다. 땅을 파서 주발(椀) 모양같이 하고 이를 이름하여 와아(窩兒)라 부르며, 혹은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와(窩)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혹은 섬돌 위(階上)에 와를 만들어 놓기도 하며, 혹은 평지에 만들기도 한다. 구(毬)가 굴러갈 때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혹은 비켜가기도 하며 혹은 굴러가기도 하여, 각기 그 와(窩)의 소재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한 번 쳐서 와 속에 들어가면 산가지(算) 2개를 얻고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하고 구가 그쳐 있는 곳에서 두 번 세 번 쳐서 들어가면 산가지 1개를 얻는데, 한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구는 두 번 치지 못하고 죽으며, 두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구는 세 번 치지 못하고 죽는다. 이 뒤에도 이와 같다. 한 번 친 구는 비록 다른 구와 부딪쳐도 죽지 않지만, 두 번 친 구가 다른 구와 부딪치게 되면 죽는다. 이 뒤에도 역시 이와 같다. 혹은 서서 치기도 하고 혹은 무릎꿇고 치기도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내용을 보면, 여기서 봉희는 골프형태가 아닌 격구형태다. 그라운드 골프나 파크골프같지만 지상격구로 인식하는 것이 맞을듯 하다. 세종은 격방희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최초의 골퍼이야기는 계속 찾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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