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각희'는 씨름이다.

2025. 6. 30. 20:13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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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日報19301007_2-통영의 각희
釜山日報19340923_3-방어진 각희
釜山日報19340928_3-사천의 택견(각희)
中外日報19300608_4-황주각희

각희(脚戲)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무예 가운데 하나. 유연한 동작을 취하며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손질ㆍ발질을 하여 그 탄력으로 상대편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한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택견’이다."이다. 전통무예가 김명근 선생은 각희가 '까기'라는 전통무예이자 놀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까기(각희·角戲)는 한국의 전통 무예로서, 옛날 서울 답십리 지역에서 행해지던 전통문화 중 하나이고, 까기의 어원은 한자로 '각희(角戲)'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해 '까기'가 되었다는 설과 순우리말로 무언가를 치거나 때린다는 의미를 가진 '까다'가 명사화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 경남지역에서 각희를 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 일본어판 신문에는 '脚戲'로 표현하지만, 이를 한글로 번역하는데에는 '태껸'으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신문내용중에는 우승상품을 황소를 제시하고 있어 씨름으로 볼 수 있다. 과연 씨름이 맞을까? 씨름의 표현이 맞다면 일본어판에서는 '相撲'로 사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씨름 모습이 아닌, 상당히 격한 씨름이나 태껸의 모습이었기에 '각희'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방어진에서는 3일간 축제기간에 상품은 1등 60원, 2등 34원, 3등 10원, 4등 5원으로 총 10개의 상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각지에 안내문을 발송하고 있으며, 경주와 울산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어 3일간 행사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보도자료다. 사천의 각희는 사천의 강가에서 모여 경기를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씨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황주에서 개최된 각희는 씨름으로 보여진다. 단오에 그네뛰기와 함께 했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각희는 택견이라기 보다는 씨름이 맞다고 보여진다. 대구역사문화대전에는 각희를 씨름으로 명시하고 있다. 대구각희대회(大邱角戱大會)는 1922년 5월 대구토목공려회가 주최로 개최되었다. [연원 및 개최 경위] 씨름이 본격적으로 스포츠의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각저, 각희, 각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따라서 대구각희대회 역시 씨름대회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각희 경기를 관람하던 사람들이 선수의 생명이 위험할까 두렵다며 중지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씨름보다는 격투기에 가까웠다고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울산에서도 일제강점기에 각희(脚戱)라는 이름으로 1924년 제1회 남선각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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