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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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문화적 코어는?
태권도 경기의 다양성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변화에 두려워하는 일본 무도나 중국 전통우슈와는 다르다. 태권도의 발생도 이러한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해방이후 꾸준히 변해가는 전세계의 무예환경에 가장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일본의 무도나 중국의 전통우슈처럼 문화적 코어 부재를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코어가 오히려 다변화된 세계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을거라는 주장도 있다. 태권도는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적 코어를 고민하고 있다. 그 과정에 태권도 역사, 정신연구다. 특히 정신을 우리의 전통에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태권도 문화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있고, 세계인들에게도필요한 것. 30년전에도 이야기했었는데,..
2022.08.22 -
원챔피온십, 미국 기업으로 상장되는가?
아시아에서 만든 종합격투기가 미국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카타르가 지원하는 무술 회사 그룹 원이 미국 IPO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지난 15일 부룸버그경제뉴스(Bloomberg.com)가 보도했다. 종합격투기 브랜드 원 챔피언십( One Championship )을 운영하는 그룹 원 홀딩스(Group One Holdings)는 SPAC 상장 대신 미국 기업공개(IPO)를 고려하고 있다. 전략기지도 싱가포르에서 Cayman Islands로 재배치 되고 있다. MMA 회사는 12월에 Guggenheim Investments와 Qatar Investment Authority가 주도하는 주식 조달라운드에서 1억 5천만 달러(2천억여원)를 모금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Group One에 13억 5천만 달러(1조..
2022.08.22 -
연길씨름, 1953
1953년 9월 2일 연길에서의 씨름경기장면이다. 관중들과 심판의 세련된 복장이 눈에 띤다. 해방이 되고 조국을 찾지 못한 이들이 남아 사는 중국에서, 조선족 자치주를 만들어 전통을 이어 갔다. 해방직후 다른 스포츠경기도 이 지역은 훨씬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포츠역사 연구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연구지역이 중국 길림성과 북한 등을 배제한 연구는 경성중심으로 제한적일수 밖에 없다. 남북스포츠교류도 스포츠교류뿐만 아니라, 개화기부터 해방전후를 잇는 학술교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22.08.15 -
우치다 유도장을 찾아라
첫번째 사진은 1898년 명동성당의 모습이다. 서울에 우뚝 솟은 성당의 모습은 지금 빌딩으로 뒤덮힌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명동성당 부근은 일제강점기에 '메이지초(明治町)'였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명례방(明禮坊)' 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남촌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明'이라는 글자를 쓴다 해서 일본 왕의 이름을 따 '메이지초(明治町)'가 되었고, 해방이후 밝은 고을이라는 이름으로 '명동(明洞)'이 되었다. 충무로와 명동은 일본인들이 주거하던 집성촌이자 상업지구였다.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이 일제강점기 명동성당 부근의 일본 가옥들이다. 이 곳의 과거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가 러시아와 조선에 들어와 우익활동을 하며, 이 곳 명동에서 유도장을 개설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2022.08.01 -
인류무형문화유산, 태권도로 가는 길
태권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해 세계 태권도인들이 하나가 되고 있다. 그동안 세계문화유산을 표방하고 정부는 태권도 진흥을 위해 무예중 가장 많은 예산과 에너지를 부여했다. 그것은 올림픽종목으로서, 민간외교차원에서의 진보를 가져왔다. 여기에는 많은 해외개척사범과 파견사범, 그리고 많은 태권도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문화유산으로서의 공신력있는 국제적 지위는 유네스코에서 인정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역사적 논쟁으로 인해 거리가 먼 것처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인류문화유산의 궁극적 목적은 인류를 위한 문화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기존 유형유산과 무형유산을 바라보는 차이가 있다. 남북을 비롯해 세계태권도인들이 보여주는 태권도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운동은 그 자체만으..
2022.07.27 -
일제강점기 검도고단자는 누구?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검도고단자가 있었을까? 있었다. 1937년 대일본무덕회에서 검도지도자를 칭호로만 불리다 단제를 채택을 할 당시 조선관계자들에게도 단을 공인했다. 당시 6단 교사에는충무로(당시 본정)에서 무덕관을 운영하던 陳之內鹿雄와 광주고등보통학교 강사였던 堀切源一이었고, 7단 교사에는 近藤知善으로 거합도 무쌍직전영신류를 수련한 무도전문학교 검도주임교수출신, 그리고 9단 범사에는 中野宗助에게 공인되었다. 中野宗助는 1885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鉄仲流에 입문해 일본무덕회 무술교원양성소 졸업, 일본무덕회 본부 검도 조수, 교토부 경찰부 검도사범, 일본무덕회 무도전문학교 조교수, 1916년 검도교사, 1927년 범사, 1931년 조선총복부 경무국 검도사범 취임, 해방이후 경찰과 고등학교 검도사범, 19..
202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