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2018.08.23 19:59
세종의 최근거리 보좌관 김자의 격구 폐지주장에 세종은 뭐라했을까?

1425년(세종7)에 세종은 무과 과거시험에 격구(擊毬) 과목을 추가했다. 격구는 말을 타거나 뛰면서 공채로 공을 쳐서 구문(毬門) 즉 골에 집어넣는 놀이로서 고려시대에 특히 성행했다. 격구는 놀이를 통해 무예를 익힌다는 명분으로 장려되었으며 축국(蹴鞠)과 비슷하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축국은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놀이”로 정의되니,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격구는 공채를 사용하는 것이니, 축구보다는 오히려 하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김자는 “고려 말기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격구를 봄으로 인해 음란한 풍습이 있었습니다”라 하며 격구 폐지론에 동참했다. 세종은 “이 시대에 격구가 없다고 해서 음란한 여자가 없어지겠는가”라며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태조가 직접 격구에 참여했으며 “격구하는 것을 사흘 동안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정종, 태종, 세종도 격구를 좋아하여 직접 참여했다. 김자는 격구를 놀이로 보고 폐지를 청했고 세종은 이를 무예로 생각하며 옹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 아닌 놀이로서 축구의 인기가 높고 월드컵 경기가 세계경제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현대사회를 본다면 김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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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8.23 19:26
한겨레신문 1991년 4월 26일자 7면에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66 민족고유무술'택견'집념의 발굴>이라는 주제로 고 신한승선생님을 소개하는 글이 나왔었다. 신한승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택견이 지금처럼 우리 곁에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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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9:26

오는 2019년 8월 30일부터 8일간 개최되는 2019충주세계무예마스터십은 충주시를 비롯해 음성, 진천 등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22개종목 100개국 4천여명이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현재 조직위원회가 발족되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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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9:14

기타를 부러뜨린 녀석을 데리고 낙원상가를 갔다가 만난 택견 공연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전통 문화의 거리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남인사마당)’에서 약 6개월간 ‘ 주말에 열리는 서울시 택견 상설공연’이다.

공연장이 평지라 관람객들이 불편하다. 3단정도의 관람석만 만들어도 지금의 3배는 공연의 묘미를 느낄수 있을텐데 서울시와 종로구에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택견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를 할 수 있고, 우리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될텐데, 기존 결련택견앞마당은 포장마차로 내 주고, 하나 남은 남인사마당은 널부러져 있다.

택견공연이 우리 전통무예, 우리 풍물, 우리 마당놀이, 그리고 관광객들의 체험기회를 한번에 제공하고 있어 인사동의 명물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택견공연이 서울시와 종로구가 타 지자체에 빼앗기기 전에 서울택견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애호개 마포, 왕십리 성동에서도 택견판이 벌어 질 수 있다.


아들이 황인무선생님과 정주열 선생님과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황인무선생님과 허진

허진의 대리석 도전

정주열선생님과 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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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9:10

국내 최초의 1981 세계유도선수권대회 우승자
청주대학교 박종학 교수.
우승후 부상을 당해 84LA올림픽진출이 좌절된다.
다니던 유도대학(현, 용인대)을 중퇴하고, 
청주대로 편입해 졸업후 청주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청풍기유도대회에서 대학부 단체전 우승을 청주대가 차지했다.

아래 주소는 1981 결승전 영상

JUDO 1981 World Championships: Chong-Ha Park (KOR) - Serge Dyot (FRA) https://youtu.be/r7-Le2Fxr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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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9:06

'선생님! 저는 가르침에 따라 모교를 지켰으며 명예롭게 퇴진합니다.' 이 말은 지난 달 31일을 작고한 유도계의 큰스승, 고(故) 소공 김종달 전 용인대교수가 2001년 정년퇴임식을 앞두고 연구실에서 작성한 글의 시작부분이다. 이 한 구절에 평생 유도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여기서 ‘선생님’은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를 만든 고 이제황 선생을 말한다. 

대한유도학교시절부터 국내 유도인재를 육성하는 데 최고로 인정받았던 김 교수는 지난 2일 가족장으로 소박한 장례를 통해 이제는 한국유도의 혼으로 남게 됐다. 생전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고, 제자와 유도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던 그는 평소 소박한 삶을 살면서 제자들에게 귀감을 보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원한 유도계의 큰스승으로 그를 존경한다.김종달 교수가 쓴 글과 제자들의 기억을 토대로 그의 삶을 정리해 보았다. 


청년 김종달, 스승과의 약속  

청년 김종달은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유도학교의 탄생지인 서울 중구 소공동 111번지로 자신의 본적을 이전할 정도로 학교와 유도를 사랑했다. 그의 아호를 ‘소공(小公)’으로 한 것도 모교와 유도에 대한 삶을 만들어준 곳이기 때문이다. 

1958년 청년 김종달은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시청 앞에 있는 소공동 대한유도학교를 찾았다. 6.25 직후 혼란한 한국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전국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던 유도학교에는 항일영웅이던 이범석 장군과 유도계의 민족주의자였던 이제황 선생이 있었다. 당시 김종달의 동기는 26명으로 현재 세계생활체육총연맹(TAFISA)의 총재인 장주호 전 경희대 교수를 비롯해 미주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 등 쟁쟁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 

초창기 대한유도학교는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함께 소공동 건물을 사용하던 대한유도회와 한국유도원은 대한유도학교 구성원들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만 해도 유도학교 출신들은 교사나 경찰, 군장교, 그리고 해외진출 등 다양한 진로가 있었다. 하지만 청년 김종달은 어려운 학교를 위해 “다들 떠나도 너만은 끝까지 남아서 모교를 지켜야 한다”라는 스승 이제황 선생의 유훈을 지키려 애를 썼다. 그는 “신입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모교인 유도학교와 흥망성쇠를 함께 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김종달이 유도 및 유도학교와 평생 함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제황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는 이제황 선생에 대해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고, 손을 꼭 쥐어주며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이제황 선생의 속깊은 애정이 나를 평생 유도인으로 남게 했다”고 회고했다. 

유도학교의 진가를 널리 알린 것은 1958년 김종달이 대학 1학년 때 열린 제2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58)였다. 한국전쟁 직후로 어려운 경제여건에 일본까지 갈 항공료가 없어 학교 교수들이 사비를 털어 여비를 마련했다. 김위생(전 유도학교 교장)이 처음 국제대회에 출전하였고, 그 뒤를 이어 6년 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청년 김종달은 김의태와 함께 도쿄 땅을 밟았다. 김의태가 동메달, 김종달이 4위에 오르면서 정책종목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67년 12월 미국 <블랙벨트> 지에 소개된 김종달 교수(왼쪽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제황 선생.


김종달은 1968년 결혼해 대한유도학교 교수(현 용인대)에 재직하면서 국가대표팀을 맡아 유도지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아시아유도심판시험에 합격해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1977년에는 당시 유도 7단으로 미국 미시건주립대학으로 가 1년간 유도를 지도했고, 이후 국제심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0년 대한유도회 이사로 선임되어 유도행정에 참여했고, 1981년에는 대한유도회 경기이사이면서 국가대표 코치로 선임되어 1982년 쿠웨이트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한유도회 심판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유도대표팀은 김종달 교수를 단장으로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김 교수는 그때 김상철 감독과 장은경 코치, 천길영 코치 등과 함께 김재엽, 윤용발, 안병근, 김건수, 조용철 등 스타선수들을 만들어냈다.


한국유도의 스타 발굴로 일본을 넘다 

한국유도가 일본을 넘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3년 개교 이후 12년이 되던 1965년 해부터 스타급 유도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도학교의 소공동시절 각종 국제대회에서 박길순(65-66년), 김정행, 김병식(이상 67년), 김상철, 장인권(이상 69년), 최종삼, 이용덕(이상 71년), 한성철(72), 주창옥, 박석병(이상 73년), 이한석(75), 장은경(76) 등 배어난 후배이자 제자들이 60, 70년대 한국유도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1964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유도선수들. 김의태가 왼쪽, 김종달이 가운데다. [이미지=경향신문 1964년 10월 19일자] 

유도학교가 가장 힘들었던 풍납동 시대에서도 좋은 선수들은 계속 나왔다. 1980년 대체올림픽으로 개최된 제2회 전미 오픈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윤익선(현 용인대 교수)과 1981년 세계유도선수권에 한국의 사상 첫 금메달을 딴 박종학(현 청주대 교수), 그리고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병근(현 용인대 교수)과 은메달리스트 황정오,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현 용인대 교수) 등이 일본유도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5년 용인캠퍼스 시대가 되면서 환경은 한층 좋아졌다. 김종달 교수는 "88 서울 올림픽의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 1989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김병주(현 공군사관학교 교수)와 동메달리스트인 윤현(현 용인대 교수), 그리고 1991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김미정(현 용인대 교수)과 문지윤, 같은 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정훈(현 용인대 교수), 199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미정과 문지윤 등이 한국 유도의 최고 전성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김종달 교수는 교수 시절 매일 유도장을 찾아 제자들과 함께 도복 깃을 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 풍납동에서 용인으로 이전한 1985년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일이다. 교수가 된 제자와 재학생인 제자들과 운동 후 기숙사에 있는 사우나에서 함께 몸을 풀기도 했다. 방학 때는 선수단인 훈련단과 함께 땀을 흘리며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용인대 유도장을 생전에 ‘영혼의 도장’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제자들이 세계유도를 주름잡을 수 있게 만든 터전이었고, 수많은 올림픽스타를 발굴한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이 일본 유도를 이기며 세계적인 유도강국으로 우뚝 서자 김 교수는 이곳을 ‘한국 유도의 요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애정을 뒤로하고 그는 2001년 8월 모교인 용인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남아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역할을 했다. 

필자는 대학원시절 원로교수였던 김 교수와 자주 만났다. “어떻게 공부하느냐?”, “힘든 것은 없느냐?”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와 밥을 함께 먹자고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원로선생님으로서 어려웠고, 전공이 다르다 보니 몸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따뜻한 식사를 한 번이라도 모셨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이후 조문을 받지 말고 가족이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들었을 때 마음이 뭉클해졌다. 항상 배풀기만 하고, 받으려 하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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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8:57

'문학으로 보는 2016 청주세계무예마스터십'을 2016년 12월경 한국문인협회 충북지회 회원들이 발간했다. 2019충주대회를 앞두고 조심스레 읽어 본다. 무협을 제외하면 무예와 관련된 최초의 문학이 아닐른지. 문인들이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접한다는 것은 기쁜일이다.

스포츠문학에 대한 정의는 딱히 없다. 다만 문학과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학계에서는 논의되고 있다. 

2015년 김옥희선생이 저술한 <일본 근대문학과 스포츠>에서는 "스포츠가 정치와 결탁한 근대의 비극을 이야기하며, 스포츠가 예술과 가까이 있을 때 진정한 스포츠 정신의 구현이 가능해지고 평화로운 사회의 실현이 가능해지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스포츠가 현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고, 매스컴과 상업주의의 결탁, 거기에다 내셔널리즘까지 가세한 스포츠가 우리 삶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스포츠문학에 대해서는 신상성 전 용인대 교수가 재직시절 무예와 스포츠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신교수의 꿈을 함께 이루지는 못했다. 최근 문학전공자들이 스포츠와 관련된 문학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을뿐이다. 

'문학으로 보는 2016 청주세계무예마스터십'은 한국문인협회 충북지회 회원들이 만들어낸 책이다. 무예와 무예마스터십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표현력은 배울만 한다. 그리고 무예사적 측면에서 귀한 자료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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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6.27 08:45

<태권도>  

이 작품은 한국문인협회 충북지회가 발간한 <문학으로 보는 2016청주세계무예마스터십>에 등재된 작품임. 


순백의 도복을 입은 자

불타는 눈동자는 헛되이 곁눈질하지 않고

반듯하게 각 세워

세상앞에 내놓는

올곧은 발자국은 

방향을 틀어도 

한결같이 떳떳하구나


심상에 잡힌 학 한 마리

의연히 서 있어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것처럼

일순간 숨 막히는 고요가 

엄숙하게 지나가면


주저 없이 허공 속에 뛰어올라

불가능을 격파하는 

무예의 전사


퍽!

나무 조각별들이 반짝거린다

박수갈채 쏟아져 내린다


작가 김현순

2003년 <문학저널>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내륙문학회원

시집 <긴 치마를 입고 들길을 걸어보라던>

공저 <충북문학>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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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3.06 15:33



카바디~ 카바디~ 카바디~”

 

공격선수는 공격내내 숨을 쉬지 않고 카바디를 외치며 7명의 수비선수를 향해 공격한다. 마치 격투기와 같고, 술래잡기와 유사하며, 얼음땡과도 비슷하다. 배드민턴 경기장과 비슷한 규모의 경기장을 반으로 나눠 전·후반 40분을 상대팀 공간에 침투해 상대선수를 손으로 건드린 뒤 중앙선을 넘어 귀환하면 1점을 얻는다. 반대로 붙잡히면 1점을 내줘야 한다. 4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고대 인도의 무예이자 스포츠, 그리고 병법으로 불리는 카바디(Kabaddi) 경기장면이다.

 

고대 인도의 병법으로 불리는 카바디는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동양의 전통스포츠이자 무예다. 카바디는 인도에서 오래전 신화속 이야기가 스포츠로 부활된 것이다. 인도의 3대 서사시중 하나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는 전사인 아르주나(Arjuna)가 쿠주크라 전쟁중에 차크라뷔하7명과 맹렬하게 싸웠지만 적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살해된 것으로 나온다. 인도의 고고학자들은 카바디가 아비마뉴의 용감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인도의 불교문학에서도 카바디가 고대 인도에서 많은 기품을 가지고 경배되고 실천되어 왔다. 이처럼 카바디는 인도인들의 역사속 이야기와 더불어 삶의 일부분이었다.

 

숨을 참는 스포츠, 인도의 국가적 차원 지원 종목

 

현대 카바디는 인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청소년들의 신체발달을 위한 중요한 스포츠로 장려하고 있다. ‘카바디(Kabaddi)’라는 말은 인도의 타밀나두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Kabaddi’라는 단어가 타밀어인 ‘Kai-pidi’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바디는 인도와 주변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타밀나두에서는 카두두(kadaddi)’나 차드쿠두(chadukudu)’, 펀자브(Punjab)의 북부지역에서는 카디(kauddi)’, 동부지역에서는 후투츠(hututu)’ 등으로 불리며 대중화되어 왔다. 또한 주변국가인 방글라데시와 몰디브에서는 하두두바바틱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kabaddi’는 모든 형태의 합성어로 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카바디는 힌두어로 숨을 참는다는 뜻으로 이 말이 곧 경기명칭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카바디 경기는 전통 스타일(Kabaddi), 비치 스타일(Beach Kabaddi) 그리고 원형 스타일(Circle Kabaddi)와 같이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명의 공격하는 선수가 상대를 터치하면 득점하는 방식이며, 다 수의 수비역시 공격선수를 터치해 득점하는 방식의 경기다. 이 과정에서 상대와 겨루는 다양한 기술과 체력이 요구되며, 선수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호신적인 무예 기술들이 발휘되기도 한다. 양 팀 각 7명으로 구성되어 전·후반 40분 동안 경기를 펼치는 단체전 경기다. 먼저 공격권을 잡은 팀에서 침입자’(raider)라고 하는 1명의 공격수를 상대팀으로 보내면서 시작된다. 공격수의 목적은 숨을 멈춘 상태에서상대팀의 선수들을 터치하거나 붙잡은 뒤, 자기 진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공격자가 상대팀을 터치하거나 붙잡은 뒤 무사히 자기 팀으로 돌아오면 터치당한 상대팀 선수는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하며 공격 팀에게 1점이 가산된다. 공격을 할 때 공격수가 반드시 숨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 경기의 중요한 규칙이다. 공격수는 자신이 숨을 멈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카바디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빠르게 외쳐야 한다. 공격선수가 카바디를 의도적으로 늦게 외치면 파울이 되며 상대팀에게 1점이 주어진다. 수비팀에서는 공격자가 숨을 멈춘 상태에서 자기 팀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숨을 참고 있는 동안에 자기 팀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공격자가 퇴장당하고 수비팀의 점수가 올라간다. 상대팀 전체가 퇴장당하면 추가로 2점을 얻는다. 경기가 끝날 때 점수가 높은 팀이 최종 승자가 되며, 동점일 경우는 연장전 전·후반 5분씩을 더하게 된다.

 

 

올림픽의 꿈, 2019세계무예마스터십 정식종목 채택 예정

 

카바디는 1918년 인도에서 국가스포츠로 지정되어 인도의 주류 스포츠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수육성은 물론 전국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시범경기를 선보임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교육연구소로 유명한 HVPM(Hanuman Vyayam Prasarak Mandal)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카바디를 선보였으며, 인도정부역시 올림픽에 진출할 수 있는 꿈을 꾸었다. 당시 히틀러는 베를린올림픽에 연구소에서 펴견된 35명의 시범을 격려하기 위해 올림픽기념 메달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도의 정세가 악화되고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현대 카바디는 인도와 주변국가의 지역흥행뿐, 국제적인 스포츠계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체계적인 조직은 1950년에 인도카바디연합회(KFI, The Kabaddi Federation of India)가 창설되었고, 1973년에 인도아마추어카바디연합회(AKFI, The Amateur Kabaddi Federation of India)가 창설되면서 인도내 조직을 강화하였다. 그 후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카바디는 아시안게임 종목으로서의 정착과 더불어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세계 65개국 50여 만명의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성장했고, 세계대회와 더불어 프로리그가 개최되고 있다. 또한 2019년 충주에서 개최되는 제2회 세계무예마스터십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바디는 여러 무예와 같은 동작이 포함되어 있고 호신기술이 접목되어 있다. 기존 무예경기가 개인이 주체라면, 카바디는 팀을 구성하여 서로를 보호하고 공격과 수비를 하는 전술이자 병법 스포츠다. 카바디는 개인이 상대방의 팀을 상대로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의 적합성과 집중력뿐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 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특히 경기는 민첩성, 근력, 호흡, 속도, , 체력, 잡기, 차기, 걸기, 그리고 빠른 반응에 대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경기장면은 스릴이 있어 매우 인기가 있으며, 관객의 응원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국내에서 카바디가 알려진 것은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가 계기가 된다. 20024월에 대한카바디협회의 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2006624일에 대한카바디협회가 창립되었고, 20132월에 대한체육회로부터 정가맹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카바디는 1990년 제11회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 엘리트 스포츠로 성장했다. 남자 카바디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파키스탄과 같이 공동 동메달을 획득해 아시 4강팀이다. 최근에는 여자대표팀도 비치아시안게임 3번 동메달, 2016년에 열린 제4회 아시아여자카바디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2017년 제5회 아시아여자카바디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등 인도 다음의 강팀으로 성장하고 있다. 우수한 한국선수들은 인도의 프로카바디에서 활동하고 있다. 뱅갈워리어스의 이장군 선수는 2017년도 리그 1위팀의 에이스 레이더(공격수). 억대 연봉을 받는 첫 한국선수로 인도에서 인기가 많은 선수다. 같은 팀에 고용창선수, 자이프루 핑크파트너팀의 이재민, 타밀달라이바스팀의 이동건 등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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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1.13 04:29
북경체육대학의 옛건물(북경체대 전신 중앙체육학원)앞에 태권도 조형물이 상징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체육총국 주변에는 온통 체육홍보고 무술도 빠지지 않는다. 중국무술운동센터는 무술을 장려하는 정치지도자들의 글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체육총국 설립이전에 무술총국산하에 체육국이 있었을 정도로 중국은 무술이 선이었다. 우린 왜 무예를 선에 두지 못했을까?  일본도 무도정책을 내세웠는데...

과거에 기차역이나 기찻길을 반대하는 유지들이 있었다. 풍수 어쩌고 이야기하는데,  알고보면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다른 일을 찾아 가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노동력 착취를 위한 유지들의 꼼수였다.

우리나라 무예의 무관심은 그런 꼼수가 아니었을까?
국민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뭐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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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8.01.13 04:15
중국의 무술서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 매년 중국무술운동센터의 중국무술연구원이 해낸 일이다.

 중국무술연구원에는 매년 중국내 무술정책뿐만 아니라, 무술 현황을 분석하며, 기술변천과정 등을 연구한다. 수많은 중국 무술서도 이 연구원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원의 활동은 북경체육대 등 체육대학 무술학과와도 연계 되어 있다.

현재 우리 정부도 무예진흥 기본계획 연구를 모연구기관에서 진행중이다. 2008년부터 몇차례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예계 목소리가 커지면 '하는척' 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매번 같은 연구기관에  비슷한 연구진들이 재탕삼탕이라는 무예계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구는 하는데 연구 결과 발표후 정부는 묵묵무답이었다. 지난 9년동안 그래왔다.

무예를 전담하는 연구기관이 설립돼 무예전문 연구진들의 활로를 열어 주어야 한다. 우리 무예계에도 훌륭한 연구인력들이 많다. 체육학, 역사학, 한국학, 의학, 공학, 경영학, 교육학, 이학 등에서 무예를 연구한 전문 연구자들이 무예연구기관 설립을 통해 맘껏 연구할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중국무술운동센터 #중국무술연구원
#중국무예서

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8.01.13 04:04
북경체육대학에 무술관 건립이 한창이다. 이 공간은 경기종목의 무술과 무술공연팀이 함께 사용한다고 한다. 각 종목별로 대학내 산재되어 있는 도장과 수련공간이 있지만, 이 무술관이 완성되면 대학상징이 될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많은 대학들이 공공연구기관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술역시 이 곳이 중앙무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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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8.01.13 03:53
무예엔 계보가 있다. 계보랄 것도 없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라도 솔직해지면 될 것을, 일부 창시 무예인들은 그것을 솔직히 밝히지 않고 있다. 최근 '한국의 무예'라는 주제로 공동 집필을 위해 자료 정리중에 나타난 문제중 하나다. 간단한 소개서 수준이지만, 이 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무예들이 많다.

산에서 배웠고 들어보지도 못한 스님을 팔아 먹는가 하면, 무예와 전혀 상관 없었던 조상이 갑자기 무인이 되어 가전무예로 등극하기도 한다. 무예라고 목소리 높이며 외치는데, 실체가 없는게 많다. 그렇다면 그 무예의 동작은?  공부를 했다는 사람일수록 무협을 쓰고 있고, 여기저기 짜깁기 일색인 단체도 많다. 아주 상상의 무예가 극에 달한다.

솔직해져야 한다. 창시자가 어떤 무예들을 수련해 어떠한 깨달음으로 어떤 형태와 수련방법이 있다라는것은 설명하면 될 것을, 사기도 유분수지, 개족보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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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8.01.09 16:02

새해의 무예 움직임으로 표현한 무예전문 이진혁 작가의 ‘무술(戊戌)무술(武術)’



무술(戊戌)은 육십 간지 중 35번째로 '()'는 황()이므로 '노란 개의 해'라고 하여 황금개띠의 해라 불린다. 무술(戊戌)과 무술(武術)은 우리 말로 같은 음이다 보니 무예계에서는 올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평창동계올림픽이나 6월에 있을 지방선거의 관심, 그리고 마케팅계의 개띠 마케팅이 유행하는 것처럼 새해들어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성장을 바라고 있다. 역술인들도 동서남북 주변국의 조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운이 2018년 무술년에 좋은 결과로 나올 것이라는 호운이며, 고생하고 꿈꾼 만큼 이루어지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희망적인 한 해로 보고 있다.

 

무술(戊戌)년 무술(武術)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무술년의 역사적 사건은 698년 발해건국을 시작으로 1418년에는 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고, 1658년에는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2차 나선정벌에서 우리 군이 사격술과 전술을 과시하였으며, 1598년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계기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낸 해이다. 무엇보다 무예와 관련해서는 1778년 정조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정조의 개혁 의지는 무술년이던 17786월에 발표한 경장대고(更張大誥)에 담겨 있다. 여기서 경장개혁을 의미하며, ‘경장대고는 개혁을 하기 위해 국왕이 제시한 큰 정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군사제도 개혁중 하나가 표준화된 무예체계 정비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각 군영의 무예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군영마다 명칭과 훈련체계가 달랐다고 한다. 이 무예체계 정비는 각 군영의 군권을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체계를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정조는 한성의 주요군영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용호영의 훈련체계를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1785병학통이 편찬되었으며, 다음 해인 1789년에는 무예도보통지편찬을 명하여 1790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인재등용방식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다. 과거시험에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로 구분되었는데, 무술년 1838년은 무과에서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문과에 3명을 선발한 반면, 무과에 71명을 뽑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술년 1838111() 비변사에서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효종에게 봄가을로 강무(講武)하여 군병(軍兵)을 조련하고 만약을 대비하자고 제안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대표적인 활터는 황학정(黃鶴亭)이다. 이 황학정은 1898년 무술년에 고종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경희궁 내 '회상전(會祥殿) 담장에 있던 활터를 말한다. 한때 고종이 이곳에서 직접 활쏘기를 하였던 곳으로,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고종의 모습이 노란 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황학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활터는 1922년 일제가 이곳에 학교를 짓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서울 사직공원(사직단) 북쪽 인왕산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활쏘기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유일하게 황학정만이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대한제국 왕의 활쏘기 장려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당시에 개혁의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같은 해 황국협회 설립은 독립협회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관청과 관련을 맺으면서 단결이 잘 되는 부보상을 동원하여 민중집회를 물리적으로 훼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무관학교 출신의 길영수를 비롯하여 홍종우와 이기동 등이 각 처의 보부상들을 규합해 협회를 설립하는 등 혼란의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 무술년인 1958년은 한국전쟁이후 재건과정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격동의 시대였던 이 시기의 현대사는 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며 ‘58개띠라는 말이 거의 관용어로 굳어졌다. 사상 최고의 출산율인 6.3명을 기록하며 지금도 전체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현대사의 주역들로 불리기도 한다. 1973년 이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생겼고, 1977년 본고사를 끝물로 역대급 경쟁률로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대학에서는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시기 무예는 사회 안정을 담당하던 경찰과 교도관중심의 수련과 대회가 주를 이루었다. 경찰의 날을 기념한 전국경찰무술대회가 개최되었고, 19585월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시범경기였던 유도종목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승부로 비겼다. 당시에 출전한 유도선수는 우리나라가 2, 일본이 6, 대만이 4명이 경기를 하였다. 이 대회에 유도 감독은 이제황 당시 대한유도학교 교장(, 용인대)을 비롯해 이석국, 권용우, 김위생, 서정현 선수가 국가대표로 선발돼 권용우와 이석도가 출전한 것이다.

 

무술경관들로 구성된 국회경위 사건을 다룬 당시의 신문



그러나 현대 무예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다. 국회 경위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무술경관들이 관여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동아일보, 1224일자)에는 195812월 지방 각 경찰국 소속의 무술경관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국회에서 농성투쟁중인 긴박한 상황에서 무술경관들이 투입될 것과 경북과 경남 경찰국에서 유도특기 경관 70여명과 전남과 전북경찰국에서도 차출되어 서울에 집결한다는 기사다. 당시 자유당에 의해 신국가보안법안을 반대하던 야당의원들의 국회 농성과 관련이 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해인 19593월에는 3백여명의 무술경위(당시 무술경관들로 구성)들의 완력에 의해 야당의원들을 제지하고 법을 통과시켜 무술경관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술경위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무예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건이다.

 

2018년 무술년 무예계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청사건립이 시작된다. 유네스코의 무예를 관장하는 재단이 설립되고 1년이 지난해인 만큼 전통무예의 활로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국립무예진흥원 설립을 위한 정부의 사전조사가 이루어진다. 이미 학술용역에 대한 국비가 확보된 상태여서 무예인들의 희망인 (가칭) 국립무예원 청사의 목표가 설정될 것으로 보인다. , 2019년 개최될 충주세계무예마스터십의 조직위원회가 연 초에 발족해 대회준비에 들어가며, 2021년 제3회 세계무예마스터십 유치도시의 윤곽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전통무예진흥법의 개정을 통해 무예단체의 국비 또는 지방비의 지원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무예계의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역대 무술년은 변화와 개혁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많은 부분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해 이기도 하다. 무술년은 정치와 경제 측면에서 기운이 밝아 사회 전반 분위기가 좋아지며, ()의 기운이 강해서 새로운 시도와 변화가 많은 해하고 보고 있다. 무술년, 무예계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예단체들의 단합과 무예진흥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10년간 잠자고 있는 전통무예진흥법도 이제는 깨워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제 무계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창출되길 기대해 본다.

 

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7.11.19 10:37

합기도 단체들은 무려 50여개로 분파로 나뉘어 사단법인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서로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1959년에 태권도의 경우 최홍희에 의해 무술단체가 통합된 적이 있다. 당시에도 무덕관을 비롯한 몇 개 단체가 통합에 문제가 있었고, 아직도 대한태권도협회와 다른 노선을 걷는 태권도단체도 있는 것을 보면 무술단체들의 분파성은 뿌리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첫째, 무술단체의 분파 형태는 몇 가지의 내, 외부적인 요인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무술단체분파적인 현상이 무술내용의 기술적 체계에 의한 분파라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도 있고 무술의 속성상 자연스러운 면도 있다. 무술의 기술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보다 더 나은 기술체계로 무술이 재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기 단체의 기술적 우위를 강조하고 자기 단체의 기술적 체계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행위는 경쟁이 있는 경우에 보다 발전적인 현상이 될 수도 있다. 택견단체와 해동검도단체의 경우에 기술적인 체계를 가지고 서로 다름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일부 있기는 하다. 택견의 경우 문화재 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사 택견단체들의 조직이 비대해지고 있고, 해동검도의 경우는 규모가 확대되면서 분파되기 시작해 지금은 합기도와 유사한 분파형태를 보이며 해외에도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분파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원류에 대한 법적논쟁이 있어 해당무술에 대한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기술상의 분열과 분파이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둘째, 이권과 관련된 갈등으로 나타나는 내부적인 요인이다 .

무술단체의 이권은 대부분 하위단체나 하위도장의 장악과 관련하여 승급 및 승단 시의 심사비 횡령과 각종 자격증 남발로 나타난다. 이권과 관련한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의 갈등이 보편적인 상도덕행위를 넘어서서 윤리적인 문제로 나타날 경우에는 대단히 치명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무술계에서 서로 도덕성 시비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단체들은 대부분 협회와 연맹이라는 단체운영이 아닌 도장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고 운영한데 문제가 있다. 가장 많은 분파를 보이고 있는 합기도류와 해동검도류의 경우는 각 지역별로 법인화를 추구해 전국단체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시도 총관장의 성격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법인화를 통한 분파의 특성은 대부분 승급과 승단에 대한 이권문제가 지배적이며 기술체계는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법인의 단체형태지만 운영은 총관장과 다를 바 없는 관(館)중심으로 운영으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거나, 지방자치단체의 축제가 증가하면서 무예단체의 도장교육에서 벗어나 시연단이나 예술단형태로 운영되는 단체들이 많아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셋째, 정치권과의 밀착에서 학습된 외부적 요인이다.

우리나라의 무술단체는 정치권과 대단히 밀착되어 있고, 2008년 3월 전통무예진흥법 제정이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이는 무술의 특성상 일정부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술관계자들이 과거 권력의 하수인 노릇한 경우는 일제시대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제1공화국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무술경관들이 국회에서 야당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 좋지 않은 일을 하여 정치깡패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총선이나 대선에서 특정후보들의 보디가드로서 인원동원과 요인보호라는 임무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의 행태를 학습하여 정치적 분파주의가 나타나면서 무술계를 정치판으로 만든 면이 너무도 많이 있다. 또한 지역정치인들이 도장을 운영하는 관장이나 사범들의 힘을 빌어 지역민과 접근을 시도하는 사례도 있고, 이런 관계는 당선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선거이후 신생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금을 받는 특혜의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 더욱 큰 문제는 무술단체에 ‘총재’나 ‘명예총재’라는 직위로 참여하는 정치인들의 경우 무술단체의 실제적 등기임원이 아닌 얼굴마담의 역할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니 무술단체에서 정치권의 유력인사를 영입하는 경우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에 가장 많이 있으며, 여당의 정치인을 선호하고 그들을 유입해 정치계와 다를 바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의도를 가지면서 정치인들의 파당행태를 학습하여 정치권 이상으로 정치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넷째, 정부의 정책의 변화에 따른 외부적 요인이다.

1989년 사회체육지도자(현, 생활체육지도자) 제도를 실시하면서 무술종목을 채택하고 1990년대 후반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의 행정규제 완화, 그리고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 제정과 같은 외부적인 정책변화에 따라 무술단체들의 이합집산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무술단체들의 분파주의는 무술 그 자체를 위해서도 대단히 좋지 않은 현상이다.

단체운영과 관련된 협회장과 관련 보직자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단체가 분열되는 모습은 영문도 모르는 무술수련자들에게 크나 큰 피해를 주고 있고 특히 스승과 선배를 존중하는 무술의 특성과 자기 무술의 권위와 무술의 역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자기 무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자기 부정이라는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하기도 되면서 무술의 본질과 무술계의 권위와 질서를 파괴시킨다. 또한 무술단체들 간의 법정다툼은 무술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재 분파주의를 일으키는 협회장들의 면면을 보면 과거 타무술이나 타단체에서 주요보직자로서 사무총장 혹은 사무국장 등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협회를 운영하고 조직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정치인들의 행태이상으로 과격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무술인들이 정치인을 답습하고 정치인의 무술계 개입이 무술이 지닌 본래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등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7.11.19 10:26

창시-분파-통합-분파-창시 등으로 반복되는 한국무예계의 생리를 두고 일부에서는 답답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런 모습때문일까?  무예 언론들이 여러 사건들을 기사화하면서 비판의 소리를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지만 정부관계자들은 물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이다. 이러다보니 어디부터 잘못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무예계는 또 갈팡질팡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익을 챙기겠다고 일부 단체들은 얼마되지도 않는 금전적 이익에 싸움하는 모습은 마치 밥그릇싸움이 아닌 구걸하는 갈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온통 여기저기 축제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축제장을 점유하기 위한 모습은 안타깝다는 생각도 해 본다.

한 무예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단시간에 만들어지기 어렵다. 결국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하고 그 시간 속에서 해당무예가 추구하는 이념과 원리로 기술체계가 정립되어 간다. 말만 협회지 유사단체와 동일한 기술체계라든가 용어도 똑같다면 독립무예로 보기 힘들다. 이들은 그냥 특정무예의 관(館)중심 무예로 볼 수밖에 없다.

무예의 교본들을 보면 대단한 창의력(?)으로 짜깁기 그림책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어떠한 원리인지, 어떠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논리는 부족하다. 이렇다보니 파생 혹은 분파, 그것도 아니면 급조된 무예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태권도도 최근들어 이러한 논쟁에서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솔직담백한 논의로 지식체계 만들어 가야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을까? 몸으로 전승된 무예이건, 창시된 무예이건간에 그것을 정리해 가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소홀한 점이 많았던 것이 원인이다. 그냥 그림책을 만들거였다면 비전(秘傳)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나을 뻔한 무예들도 있다. 무예교본은 해당 무예를 평가하는 소중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 무예의 지식체계는 혼자 고민하는 것이 아닌 둘 이상이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무예의 특성상 비전적 요인을 고려한다면 창시자나 전승자가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한 원리로 대신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시대는 그러한 논리로 많은 사람을 이해시키는데는 한계가 있다.

무예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식체계의 관리나 윤리지침의 제정과 그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 승단제도나 칭호, 그리고 단체내부의 시스템이 구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 많은 무예단체들은 도장 하나에 협회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무예단체로 보기도 어렵고, 그 무예가 완성된 무예로 보기도 힘들다. 당연히 그런 무예는 시스템도 부족하고 정체성도 부족한 단체로 평가될 수 있기때문이다.

무예인들의 솔직하지 못한 무력(武力)도 문제다. 자신이 어떤 무예를 접했고, 얼마나 수련했으며,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무예를 창시했다 고 한다면 어떤가. 그러나 많은 무예인들은 삼국시대의 벽화를 그려 놓고 조선시대 <무예도보통지>를 차용해 무예계의 윤리를 망각한 일을 아무 부끄러움없이 하고 있다.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할 무예계가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무예의 경우에는 이념이 있다. 그 이념을 바탕으로 기술의 원리와 그 무예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 무예의 정당성은 담보된다. 하지만 유사한 기술들로 여기저기에서 짜깁기를 해 놓고 쇼(show)적 무예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현실은 우리 무예계를 왜곡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그동안 먹고살기 위한 단증장사니 상업성이니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는 무예의 지식체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겨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금이라도 수련하는 제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기술의 논쟁을 일으킬 때 기득권 지도자들은 겸허히 받아 들여야한다.  끊임없는 논의와 솔직담백한 토론을 통해 지식체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당장의 순간적인 이익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무예에 대한 정체성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7년전 무카스에 기고한 글이다.
다시 읽어보며 또 생각해 본다.
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7.11.18 13:43

세계무예마스터십위원회 WMC가 상표등록이 되어, WMC허락없이 사용할 경우에 상표법 위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7.11.15 15:15
Report/Martial Arts2017.11.15 15:14
Report/Martial Arts2017.10.17 14:36


초딩 아들이 찾아준 자료하나가 평소 의문을 풀게 하고 있다. 소공동을 지날때마다 옛 학교터와 주변을 찾는 것을 안 녀석이 최근 인터넷 검색방법을 배우다 찾아준 성냥값 사진이다.


거구장은 현재 서강대 정문앞 우측으로 옮겨졌다. 한국유도원이 소공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와 수년간 분쟁이 있었다. 대한유도학교가 구의동으로 쫓겨(?) 나고 한국유도원은 서울시로부터 여의도에 땅을 보상받고 이전한다.


문화재라는 이유로 이전이 불기피했다고 이야기가 전해졌고, 한국유도원은 서울시 공사 건의 보상으로 여의도로 이전했다 한다. 1971년 6월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5번지의 3에 대지를 매입하여 1972년 11월에 한국유도회관을 착공, 자금난으로 1975년 6월 택지 분할승인으로 1,041평을 분할하였으며, 일부 매각대금으로 1975년 7월 12일 완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학교와 한국유도원 이전후 학교자리는 로스구이집 거구장이 된다. 거구장, 고 한상구 회장이 운영했다. 그는 1958년부터 북창동에서 금학일식집을 운영해오다 학교자리에 1970년 12월 로스구이집 거구장을 열고 78년 화재가 날때까지 운영했다.


조선연무관에서 한국유도원과 대한유도학교 도장이었던 곳이 종업원 300여명이 근무하는 로스구이집으로 운영되기까지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 당시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 여튼 학교와 유도원은 떠나고 로스구이집이 남았다.


* 유도학교인 소공동 중앙도장이 공개입찰 끝에 애경유지에 평당 27만 5,000원에 매각처분되면서 1969년 4월 명도소송에서 유도학교 측이 패소했다. ‘건물 없는 학교’로 전락한 것이다. 이에 유도학교는 성동구 구의동 아차산 영화사 부근에 도장을 짓었지만, 불법 건물이라는 이유로 1972년 풍납동으로 이전해 운영됐다. 결국 1985년 지금의 용인캠퍼스로 이전했다. 반면 한국유도원은 중앙도장의 신축대지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보조금을 받아 여의도의 대지 2,410평을 매입, 이전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놓고 유도학교와 유도원의 갈등의 근원은 당시 유도계에 있던 YMCA 출신과 일본유학파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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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학교떠난자리에로스구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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