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2011.10.21 17:34


국내 최초로 한국합기도를 대학의 교기(校技)로 삼아 이슈가 되고 있다.


경북전문대학교(총장, 최재혁)는 한국합기도를 이 대학의 교기(校技)로 삼으면서 2012년도 수시와 정시에서 전국규모의 합기도대회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선수를 대상으로 ‘교기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혜택까지 내 놓았다. 합기도 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고 대학을 선택하려고 고민하는 합기도 수련생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합기도 수련생으로 입학하는 경우 입상 등위에 따라 등록금 50~30%에 준하는 교기장학금이 지급된다. 여기에 선수단의 경우 재학 중에는 단체복, 대회운영비, 차량지원은 물론 학기 중에도 전국규모 대회에 입상 등위에 따라 수업료의 40~20%에 준하는 장학금 지급이라는 대폭적인 혜택도 주어진다.


한국 합기도는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현재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 전 세계 70여 개국에 보급되어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타 무도에 비하여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합기도를 교기로 지정한 최재혁 총장은 “앞으로 재학생뿐만 아니라 교직원을 대상으로 합기도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심신단련은 물론 합기도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보급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또한 경북전문대학교 경찰경호행정계열(학과장, 조성종)에서는 전국합기도선수권대회에서 1~3위에 입상한 우수한 선수를 발굴해 체계적인 교육ㆍ훈련을 시킬 계획이며, 이를 통하여 대학 내 합기도 선수단을 육성, 학생들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게 하여 대학의 위상을 드높이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교과과정에서는 경찰 및 경호 관련 분야에서 실무에 필요한 교육을 병행한다. 졸업이후에는 학생 본인의 특기를 살려 취업과 연계시키기 위해 경북전문대학교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교기장학생 선발기간은 10월 10일에서 11월 24일까지 수시 2차 모집하고 있으며, 정시에도 모집된다.

합기도 선수단을 담당하고 있는 이영석 교수(학생부처장, 경찰경호행정계열 교수)는 "교기는 우리 대학을 상징하는 기예인데, 많은 무예종목 중에서도 합기도를 교기로 지정하게 되어 기쁘다" 며 " 앞으로 선수단으로 선발되는 학생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과 체계적인 지도 훈련을 통하여 기존에 합기도로 유명을 떨치는 4년제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


합기도는 대표적으로 90년 중반 Y대학교에서 격기학과 내에 전공으로 신설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많은 대학의 무도 및 경호 관련학과로 합기도 수련자들이 입학하고 있다. 기존의 여러 대학에서 합기도 수련자들의 선발에만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경북전문대학교의 합기도 선수단은 선발, 관리, 졸업 후 진로까지도 책임지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또 한국합기도를 대학의 교기로 지정한 것에 대해 합기도계에서는 찬사를 보낼 만하다.


한편, 이 대학 경찰경호행정계열은 2009년과 2011년에 걸쳐 다수의 경찰공무원을 배출과 높은 취업률로 지방 전문대학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깨드린 바 있다. 

[소마뉴스] 방환복, saok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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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6.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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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합기도의 창립자 최용술도주다. 요즘 무술계에 원로가 수련하는 모습은 흔치않다. 그러나 과거 원로들의 수련모습은 많은 사진사료로 남아 있다. 지금 우리 무술계의 원로라 하신분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일본 대동류유술의 다께다 소오카쿠원로의 생전 투기 기술의 장면이다. 이 대동류 유술을 배운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의해 훗날 지금의 아이키도(合氣道)로 정립된다.

출처: 합기공부 http://cafe.daum.net/daito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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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2010.06.13 01:15

지금 미국의 아이오와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 있는 선문대 최종균 교수는 미국의 다양한 무술원로들과 국제적인 무도계의 동향을 파악, 연구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합기도 전공 교수로 국내 합기도계의 최대 관심사인 단체 간 통합문제와 합기도 명칭에 대한 논란들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오늘은 그가 고민하고 있는 합기도 명칭에 대해 얘기 들어 본다. -편집자 주-

한국무예의 분열원인, 합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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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인으로서 바라보는 한국 합기도의 상황은 참상이라 할 만큼 비참하다. 한국 합기도 단체장들의 너무도 천박스런 이전투구의 모습들이 일선 합기도인들을 아연케 하고 있다. 송사(訟事) 만능주의와 같은 천박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무슨 고소와 고발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는 지겹다 못해 신물이 난다. 왜 이렇게 무인답지 않은 무분별한 짓거리가 횡행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러한 합기도인들의 이전투구 모습은 같은 합기도인들 뿐만아니라 여타 무도지도자들에게도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들은 합기도의 이전투구를 보면서 “합기도는 어른이 없고 제대로 된 사제정립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망나니와 같은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이전투구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오랜 합기도의 구태라는 점에서 더욱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합기도가 조롱거리가 되어야만 하는가?

한국 합기도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항상 자랑하고 있는 “합기도는 태권도 다음으로 많은 보급화가 이루어졌고, 여타 무도는 스포츠화 되어서 무도성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합기도는 무도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무술은 바로 합기도다”라는 주장은 모든 합기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합기도인들의 평가와는 달리 한국합기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도대체 한국합기도는 무도로서의 위상 정립과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로서 존재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오히려 한국무예를 분열시키는 한 원인으로 주목할 만큼 합기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절망적이다.


그렇다면 한국합기도의 분열과 이전투구는 도대체 어디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합기도인들의 밥그릇 챙기기와 사리사욕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원인분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사한 모습은 합기도만의 문제가 아니고, 여타무도에서도 이러한 분열과 파열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질적인 합기도의 문제점과 병폐를 새로운 시각으로 도출해야만 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한국형 합기도의 변화된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한국합기도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 속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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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대전대에서 열린 무카스배 합기도대회 현장 모습


주류무도(유도, 검도, 태권도)에 밀리고 지도자들의 무력(武歷)은 다양

지금까지 한국합기도의 분열모습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합기도 발전의 한 단면으로도 해석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합기도가 있기 까지는 합목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의 변화를 추구해 왔으며, 이러한 기술의 변화는 발전과정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되어 왔다. 초기의 합기도 기술을 살펴보면 술기와 대련을 불문하고 매우 단조롭고 투박하다는 인상이 짙다. 당시에는 실전에서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강한 무술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탈왜색이 모든 무술의 생존방식이었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점점 구체화 되었다. 이후 6.25의 참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더욱더 강한 무술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합기도의 무술로서 갖추어야할 실전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군사문화가 주류(Main Stream)를 형성하던 시대적 특성상 강하지 않은 무술은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이었으며, 대중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기 힘들었다.

또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한국무술의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기존의 치안을 목적으로 유입되어 활성화 된 유도와 검도가 학원무도로서 일찌감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뒤를 이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태권도가 집중적으로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태권도의 한국화 과정에 대한 논쟁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아무튼 태권도는 정부의 집중적인 보호 육성무도로서 국제화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러한 무도육성의 특정무도 쏠림은 점차 심화되었고, 주류무도에서 제외된 무술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수련체계가 비슷한 무술에 더부살이를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무술단체로서 형태를 갖추고 수련체계를 갖춘 합기도와의 습합(習合)이 가장 용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합기도의 초기 지도자들의 무력(武歷)을 살펴보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지도자는 자신의 합기도는 가전무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지도자는 비밀리에 전수 된 불가무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표현은 다르지만 사가무술이니 도가계열무술이니 하면서 혹세무민하는 지도자들이 매우 많았다. 또한 합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통성과 신비주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기합술이니 혈도무술이니 하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 합기도를 구성하였던 지도자들이 1990년 이후에 정부의 독과점적인 법인형태를 지양(止揚)하기 시작하면서 우후죽순과 같이 새로운 무술이 파생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합기도를 분열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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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5.18 09:47

지난해 합기도원로 지한재사범이 한국을 찾았다. 선문대에서 합기도지도자들과 합동수련을 하고 무카스의 허인욱무술전위원이 지한재사범 삶을 체록했다. 체록내용을 보면 해방이후 합기도사를 말해 주는 대목이 많을뿐만 아니라, 청와대 경호실에서의 합기도인들의 삶도 들어 있다. 210년 5월11일자 <원로이야기 박정희대통령과의 인연-지한재4>를 옮겨보았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정치인들이 무술인들을 경호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특별훈련을 했던 일, 박정희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청와대 근무시절의 직급과 월급, 그리고 대통령아들이었던 박지만을 지도했던 일 들이 있다.

무예사적인 측면에서는 화랑도의 이주방, 국술의 서인혁씨에 대한 당시 활동상을 말해 주고 있으며, 신무합기도의 창설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18기와의 교류등도 있다. 특히 태권도의 초기모습과 태권도시범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어, 해방이후 합기도와 태권도의 관계가 큰 차이가 없었던 대목도 설명하고 있다.

아래의 기사는 지한재사범의 의견을 중심으로 다룬 기사이기때문에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다. 좀 더 많은 당시의 무예인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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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에 있을 때 관상의 대가 백운학(白雲鶴) 씨가 각기병에 걸린 채, 차두만이라는 사람과 같이 찾아 왔다. 백운학 씨가 ‘의사가 6개월 밖에 못 산다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백 선생님은 장래를 내다보시는 분이신데, 6개월 살다 죽으나 더 살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운동이나 하다 죽으십시오”라고 했더니, “우리 선상님 말 참 마음에 드네요”라면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꼭 10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셨다.

인연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김포공항에 각자 전송하러 갔다가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방송이 나왔다. 기가 막혔다. 당시 백운학 씨가 성무관(聖武館)이라는 관명을 지어주었다. 성인 성(聖)자를 쓰는 것인 만큼 관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게 없다고 했다. 1960년 4․19 혁명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이승만 박사하고 맞대결 하는 대통령 후보로 노동당의 전진한(錢鎭漢, 1901~1972년)씨가 있었다. 백운학 씨를 통해 전진한 씨를 소개받고 그를 경호할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이 한봉수(1933~2007)․김용진․김영환․최세호․조문영 이상 10명을 모아 중부시장에서 6개월 간 특별훈련을 했다. 그런데 전진한 씨가 통일당 김준연(金俊淵, 1895~1971)씨와 통합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동당으로 출마할 수 있어도 통일당으로는 출마할 수 없다는 법적인 해석이 나온 것이다. 이미 노동당은 없어졌으니, 전진한 씨가 출마할 수가 없었다. 출마를 포기한 것이다. 열심히 수련을 한 이들은 다시 합기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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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유희의 지한재(왼쪽)
내부적으로는 마장동 시절부터 일성체육관까지 쭉 수련을 해 온 강정수․이태준․명광식 등의 그룹과 중부시장 옥상에서 경호를 위해 특별 수련을 한 한봉수․김용진․김영환 그룹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앞서 시작한 그룹은 대학생 출신을 중심으로 한 반면, 다른 그룹은 힘좀 쓰던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앞서 시작한 쪽을 우습게 안 것이다. 그래서 한 쪽은 먼저 수련을 시작한 고참이라는 점을, 다른 한 쪽은 나이도 많고 특별반 수련생이라는 점을 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다시 중앙극장 앞으로 도장을 옮겼다. 강정수라는 사람의 부모 도움으로 차렸는데, 그 때 김무홍 씨가 찾아왔다. 김무홍 씨는 1961년 5․16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레슬링 배워서 올림픽 나가겠다고 라고 하면서 내게 “형님 서울로 불러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중앙극장 앞에 있는 내 도장으로 오게 했다. 6개월 간 도장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먹고 자고 했다. 그 당시 김우탁(金佑鐸) 씨와 허일웅(許一雄) 씨는 자띠를 메고 있었는데, 김무홍 씨가 종로 4가 종묘 입구 3층에 신무관(新武館)을 차릴 때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안타깝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서인혁 씨는 내가 서울 올라온 이후 대구에서 야와라를 배웠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내가 서울 마포 형무소 자리에서 도장을 하고 있을 때, 군대 모자를 쓰고 와서 ‘나도 최용술 선생에게 합기도 배웠다’고 말을 했다. 동문이니까 친절하게 맞이했다. 서인혁 씨가 자기 특기는 투석술이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몸에 힘주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그 기술을 배워 가지고 김무홍 씨 도장으로 갔다. 그 때 김무홍 씨가 군에 가서 없었고 원광화(元光和) 씨가 그곳에 총무로 있을 때였다. 서인혁 씨는 그 후 만리동에 도장을 냈다가 부산으로 내려가 ‘합기도 국술원’이라는 명칭으로 도장을 냈다. 서인혁 씨의 제자 중에 화랑도로 활약을 하고 있는 이주방(李柱邦) 씨가 있는데, 화랑도라는 이름을 먼저 붙인 것은 내 제자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화랑도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고 있다.

중앙극장 앞에 있을 때 5․16이 일어났고 이후에 화신 앞 동일빌딩으로 도장을 옮겼다. 화신 앞에 있을 때 ‘기도회’를 창설하였다. 이 도장이 원래 무도장 자리여서 장소가 넓었다. 방이 많이 있었는데, 내가 어릴 때 중국에 살아서 중국말을 할 줄 알아서 대사관을 찾아가 임품장․여품삼 선생을 만나 한국 사람도 가르쳐야 된다고 설득을 했다. 여품삼 씨는 큰 중국집인 송도 태화관 주인 아들이었으며, 임품장 선생은 중국 대사관 안에 도장을 가지고 있었다. 임대료 안 받고 무료로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중국 18기 사범들과 교류가 시작된 계기를 처음 마련한 것이다. 이때 딱 두 가지 기법을 배웠다. 주먹이나 발이 들어오는 것을 양손으로 올려 막거나 내려 막으면서 발을 차는 기법과 앉으면서 앞으로 긁으면서 걸어 차는 소당퇴(掃襠腿)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은 중국 국술에서 배웠다는 말을 분명히 하고 가르친다. 하지만 청와대 경호실에 있으니 도장 운영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운영이 어려워져서 세기극장 앞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는 미국에 나가려던 최세호 씨가 기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불손하게 나와서 손을 봐줬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서대문 전매청 앞으로 도장을 옮겼다가, 서대문 중소기업은행 창고로 옮긴 것이 국내에서 마지막이었다. 중소기업은행 뒤의 창고는 박종규 씨가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마련해 주었다. 한 번은 가라테 극진회관 최영의 씨가 서대문 도장에 왔다가 병목 격파 이야기를 하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우리는 병 3개씩 날리던 때였는데, 최영의 씨가 병을 깨는데, 안 깨지는 것이었다. 명광식․강정수 씨는 그냥 병을 팡팡 그냥 날리던 때였다. 최영의 씨가 설명을 얼마 하지도 못하고 그냥 간 기억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 합기도 교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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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재 선생
서울에 올라와서 5․16이 일어난 전전 해부터 육군사관학교의 합기도 사범으로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지지행진을 했는데, 교관의 일원이던 나도 지지대열에 참여했다. 이 당시가 화신 앞 동일빌딩에 있던 때였다. 지지대열에 참여한 인연으로 박종규 씨를 알아서 국가재건최고위원 경호 조직으로 들어가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의장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정리자 주 :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과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경호대’가 창설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청와대로 편입될 때 자연스럽게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1979년 12월 25일 이전에 나올 때까지 18년 동안 재직을 했다. 처음에는 3급 을이었다가 3급 갑으로, 다시 차지철(車智澈1934~1979)씨가 2급 을로 올려줬다. 부이사관급으로 당시 치안국장이 2급 을이었다. 박종규(朴宗奎 1930~1985) 씨가 주어서 관차도 타고 다녔는데, 박종규 씨는 국가재건최고위원 경호조직일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월급은 보통 공무원의 4~5배를 받았다.

경비원 안에 도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경호원들을 가르쳤다. 박종규 씨나 국가재건최고의회 신동관 씨는 민정이양 된 후에도 삼청동 본관에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차지철 씨도 내 개인지도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차지철 씨는 효자였으며 충신이었다고 본다. 차지철 씨 어머니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는데, 추운 겨울 날씨에도 차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차 밖에서 추위를 이기느라 뛰면서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모습이 기억난다.

박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씨도 초등학교 가기 전에 합기도를 가르쳤다. 한번은 박지만 씨가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친구와 싸움을 하다가 팔을 꺾어 부러뜨린 일이 있었다. 친구 부모가 청와대에 전화를 해서 ‘대통령 아들이면 팔 부러뜨려도 되냐’면서 항의를 했다. 문제가 되자, 박종규 씨가 한 두 달 청와대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그 때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심사도 하고, 세미나도 한 기억이 있다. 그 후 잠잠해지자 다시 들어갔다.

청와대 경호실에 태권도 사범으로 박해만 씨가 있었는데, 후에 내가 청와대에서 시범한 동작들을 가지고서, 그 분이 태권도 국기원 시범 부장 할 때 많이 사용한 것으로 안다. 한 번은 ‘박사범 왜 내 기술 다 가져가느냐’고 물었더니, ‘먼저 쓰는 것이 임자’라고 대답했던 일이 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원문보기 http://www.mookas.com/media_view.asp?news_no=1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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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2010.02.23 16:36

'합기도'가 명칭논란에 휩싸였다. 그동안 합기도 학계에서 제기되었던 명칭사용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국제아이키도연맹(IAF, International Aikido Federation)은 한국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스포츠대표단체인 대한체육회에 명칭사용에 대한 항의에 가까운 문서를 지난 5일 보냈다고 무예전문지 '무예신문' 2월 19일자에 보도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경우 'Aikido', 한국의 경우 'Hapkido'로 불리고 있지만, 한자표기에 있어 '合氣道'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어 동일종목이라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항의문서는 안 국제사회에서 별 탈없이 사용되던 용어에 대해 제동이 걸린 것은 최근 대한체육회에서 합기도단체를 인증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IAF의 경우 GAISF회원단체로 국제경기단체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어서 국내 스포츠를 대표하는 대한체육회 가맹에 있어 한국의 아이키도협회가 배제된 상황에서 한국의 합기도단체가 가맹될 경우 혼선이 있을 수 있다는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합기도단체들은 한국의 합기도는 일본의 아이키도와는 다른 수련체계로 별개의 무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는 일본 아이키도의 정립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이 각기 다른 기술체계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논란에 있어서는 이미 유도가 'Yudo'에서 'Judo'로 영문표기를 바꾼 1980년대 초 부터 시작됐다. 한국의 유도를 주장하던 대한유도회가 국제스포츠로서의 유도를 인정해 영문을 수정한 것이다. 또, 검도가 1990년대에'Kumdo'가 아닌 'Kendo'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명칭표기의 논란은 국제용어의 표준화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음에도 검도는 아직도 'Kumdo'를 고수하고 있고, 합기도단체들 역시 'Hapkido'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란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한 무술명칭에 대한 혼선을 막기 위한 단체들의 약속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국제스포츠계의 관례를 중시하고 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쟁보다는 국제사회에서 '짝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문제와 자칫 정통종목에 대한 활동침해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까지 번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때문에 유럽이나 미주지역에서는 한국가에서 무술을 수용하고 변용해 새로운 틀을 구성하면 해당국가의 명칭을 앞에 붙히거나, 창시자의 이름을 앞에 붙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불가리안 켐포'라든지 '브라질리안 주짓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합기도의 경우도'Korean Hapkido'라는 국제용어를 사용하자는 제안도 많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한국의 합기도가 세계화 하는 과정에서 '표준화'작업이 미흡했고, 소홀한데 있었다. 이것은 합기도단체들의 시스템 부재가 원인이 된다.

일단 IAF측은 명칭사용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합기도계에서 명칭논란은 다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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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2.08 19:14
한국 합기도역사에서 족술을 접목해 한국형합기도를 구축했던 지한재원로가 젊은 시절 이소룡과 함께 영화에 등장했다. 이소룡과의 겨루기 장면 동영상이 신무합기도 브라질회에서 유튜브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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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2010.01.21 18:00

합기도 고단자, 보카도 부흥위해 노력


산김숀(San Kim Seon)
캄보디아는 내전과 주변국가와의 분쟁이 잦은 나라다. 수많은 침략과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며 살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렇다보니 경제적인 수준도 낮고 사회적으로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동남아 지역의 유서깊은 역사지역으로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에 수많은 유적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나라에 무술이 없을리 없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이름이지만 캄보디아에는 전통무술 보카도(Boxkator 혹은 Bokator)가 있다. 13년간의 내전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 보카도를 다시 부활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 보카도의 아버지로 부르는 산김숀(San Kim Sean)를 지난 제8차 세계무술연맹 정기총회장에서 만났다.

푸르사트지방에 살던 보카도 사범인 그의 삼촌을 통해 13세부터 보카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1969년부터 한국합기도를 접하면서 2001년까지 합기도사범활동을 한 고단자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980년 폴포트 정권이 끝나고 캄보디아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에서 합기도사범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95년 보카도의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보카도의 맥이 끊길 것을 인식하고 1995년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처음엔 캄보디아합기도협회 재건과 합기도 강의에 주력했다. 당시에 캄보디아는 무장 봉기를 일으킨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이후 캄보디아 무술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여서 보카도를 배울 수 도 가르칠 수 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둔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시간에 명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2001년부터 보카도를 보급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보카도의 깊이와 기술들이 사장되고 있는 캄보디아의 실정상 남은 원로 지도자들이라도 찾아 기술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길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보카도의 기술문서들을 하나 둘 발견하게 되고, 억압과 박해,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지도자들을 만나 직접 보카도를 정리하게 된다. 특히 정부를 설득하고 승인을 받아 보카도를 다시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해 냈다. 이런 노력을 계기로 2004년에 캄보디아청소년연맹을 설립하고, 2006년부터 캄보디아전국대회를 개최하는 등 캄보디아 국기로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보카도경기화와 전통성 확보에 주력


좌측은 석굴암의 금강역사, 우측은 Bayon사원의 보카도 석상

보카도는 팔꿈치와 무릎 공격, 정강이 차기 등 지상전투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산김숀씨는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캄보디아의 전통무술이라고 강조했다. 손과 발의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무기도 주로 대나무로 만든 짧은 막대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보카도는 사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도의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앙코르문화의 전설에도 남아 있다. 이러한 보카도의 상징은 여러 사원에서 발견된다. 마치 우리나라 석굴암에 있는 금강역사처럼 사원입구에 보카도의 다양한 기법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문화적 사료가 있음에도 캄보디아가 주변국가보다 열강이라는 이유로 주변국가에 있는 무에타이나 킥복싱에서 분파된 것이 아니냐는 인식도 있다.

산김숀이 캄보디아 무술대표로 세계무술연맹에 참가하게 된 이유도 최근 캄보디아 체육회 등의 적극적인 후원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지난해에 캄보디아 IOC위원이 제7차 세계무술연맹 정기총회에 직접 참가해 보카도를 홍보했고, 올해는 산김숀이 캄보디아 대표로 참가해 유네스코와 세계무술연맹의 관계에 대해 더욱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김숀도 걱정은 있어 보인다. 보카도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당사자 입장에서 경기화를 놓고 보카도계에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산기숀이 합기도를 오랫동안 수련한탓에 산김숀의 전통적 관점에 서 있는 보카도인들이 보카도의 순수성보다는 합기도기술이 강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수용한다는 입장이다. 당연히 옛 보카도의 모습을 찾고 계승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보카도의 위험한 기술을 대중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말과 함께 현대인들에게 맞는 보카도의 정립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일부의 갈등은 앞으로 보카도의 발전과정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문제들이라고 말했다.

앙코르의 거대문화속에서 내전이라는 현대적 아픔을 딛고 캄보이아인들이 보카도의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 산김숀의 보카도 사랑이 앞으로 캄보디아인들의 희망이 되길 기대해 본다.


무카스 Tip [앙코르(Angko)문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주(州)에 있는 앙코르는 동남아 지역의 유서깊은 역사지역으로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크메르제국의 수도를 말한다. 앙코르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크메르 건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앙코르와트(Angkor Wat or Angkor Vat)는 왕조의 절정기였던 12세기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건축한 것이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에서 파생된 도읍이라는 의미의 노코르(Nokor)의 방언이고,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이라는 뜻이된다. '사원의 도읍'이라는 의미인 앙코르 와트라는 이름은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었다.크메르 제국은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며, 9세기 ~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에 존재한 왕국으로, 현재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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