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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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나눠준다고 올림픽 취소?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에서 선수단에 콘돔을 제공하자 학부모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올림픽에서 콘돔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때부터다. 당시에는 선수당 1개정도였으니까 약 8천여개가 넘게 지급되는 양이었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008베이징올림픽때는 선수단에 10만개, 2012런던올림픽 15만개, 2016리우올림픽 45만개였다고 한다. 1988년 콘돔지급은 에이즈가 국제사회에서 문제로 인식하던 때였으며,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의 콘돔의 지급이 급증한 것은 지카바이러스의 확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는 11만개로 1인당 38개정도였다. 지난 도쿄올림픽에서는 대회기간중에서는 지급하지 않고 출국시 지급했다고 한다. 이것은 코로나-19로 선수들의 만남을 금지했..
2024.01.26 -
테크노소셜리즘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요즘 유독 만나는 이들마다 이야기 주제다. 미래를 궁금해 한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일게다. 그러나 어느순간 우리는 꿈을 잃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꼰데'라는 말이 부각될수록 그 사회는 변화에 둔하다는 생각이 맞다. 스포츠계도 마찬가지다. 학교 운동부가 감소하고 있다. 스포츠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 이러다가는 국가대표만 남을지도 모른다. 2년전 나온 책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던 많은 이들이 읽던 것이다. 논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이 책은 그리 신비롭지 않았다. 특정 도서보다 UN의 보고서들이 더 신빙성이 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지금 세계의 키워드는 불평등, 인공지능, 기후변화다. 이런 세계는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까? 코..
2024.01.25 -
격검사망사고
1900년대 검도를 격검(擊劍)이라 부르던 시절, 생각이상으로 경찰과 헌병에 의무 보급되면서 당시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스포츠와 관련해서는 YMCA와 근대학교를 중심으로 알려진 반면, 격검은 경찰과 감옥소, 헌병 등의 종목으로 보급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호구라는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 때문에 유도와 또다른 보급체계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1년 부산경찰서 연무장에서는 격검을 하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검도를 하다 숨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 원로들이 젊은이들과 합동수련중에 발생하는 사고들이었다. 아래 보도자료를 보면, 사망자를 순사부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젊은 나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김주안선생님은 젊은 나이로 추정함)
2024.01.23 -
명동에 유술도장이 있었다
1932년까지(현재까지의 기록) 명동에 유술도장이 있었다. 1930년 경성에는 '유술柔術'이라는 명칭보다는 '유도柔道'로 사용했다. 그런데 1930년 신문광고에 명동의 파출소입구에 있던 '양무관 유술 도장'에서는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유술도장에서 뼈와 관련된 치료를 하는 접골원이 아니었나 싶다. 과거 유도 4단이상은 접골사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도 법률은 남아 있으나, 1960년대말부터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유술도장이라고 했을까? 19세기말 가노지고로가 니혼교 부근 도장을 방문했을때의 분위기일까? 이 광고는 줄기차기 1924년부터 1932까지 여러 신문에 나온다. 원래 병원자리를 인수한 모양인데, 요즘의 접골원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맞을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
2024.01.23 -
공수도 청도관의 미츠야마는 누구인가?
1945년 해방을 4일 앞두고 미츠야마 마사오(光山正雄) 사범에 의해, 서대문구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청도관(靑濤館)'을 연다는 기사다. 우리 태권도史에서는 이원국사범이 1944년 1월에 귀국, 8월에 지금의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당시 영신학교(永信學校) 강당을 빌려 한국에서 최초로 당수도청도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국태권도의 보급에 투신했다는 주장과, 1946년 2월(27일) 서울 시천교당(侍天絞堂) 자리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가라테 보급에 나섰으며, 청도관의 ‘도(濤)’는 자신이 무술을 익힌 일본 공수도(가라테) 송도관의 ‘도(濤)를 차용 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츠야마 마사오(光山正雄)는 누구인가? 후나코시 키친(航越義珍)의 제자이고 동경의 여러 대학에서 공수도..
2024.01.22 -
최초의 유도대학은 용인大다
1940년 일본강도관은 유도대학이라 하였다. 유도교원양성소를 설립해 학교유도교원면허 소지자와 전문대학 졸업생중 고단자를 수용하여 40명을 선발한 것이다. 1941년 2월 졸업생들을 보면, 7단 12명, 6단 14명, 5단 8명, 4단 6명이었다. 여기서 유도대학이라 함은 교원연수원 개념으로 보면 될 듯하다. 강도관이 유도대학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가노지고로 사망이후 강도관의 역할강화론이 제기되었을수도 있다. 그리고 무도교원양성소였던 무도전문학교의 변화에서 찾아 볼 수 있을듯 하다. 무도교원양성소는 대일본무덕회가 1905년에 설립했다. 이것이 무덕학교, 무덕회전문학교, 사립대일본무덕회무술전문학교, 그리고 1919년 무술을 무도로 명칭을 전환하며 사립대 일본무덕회무도전문학교, 대일본무덕회 무도전문학..
202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