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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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명예의 전당은 없다.
미국사회나 서구스포츠계는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을 잘 활용하고 있다. 지도자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와 자부심을 주는 것이고, 사회에서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존경심을 부여한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지도자는 그 명예를 지키기위해 사회에 봉사하고, 모든 활동에 대해 신중해진다.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도 배울게 있다. 상당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린, 이런 명예의 전당이 거의 없다. 있어서도 형식적이다. 특히 무술은 심신의 조화로운 인격체로서 명예를 부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우리사회는 '명예'라는 두 글자를 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돈많이 내는 사람, 정치적으로 힘있는 사람 등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감사장 주듯이 "명예단증", "명예박사", "명예시민"이라는 이름..
2022.02.24 -
검도에 유술이 있다
현대검도 이전 격검은 유술 기술도 포함 되어 있었다. 실제 일본의 경찰검도에서는 상대를 넘어뜨리고 제압하는 기술이 아직도 남아 있다. 유술은 검술에서 태어났다. 검이 없을때 손과 발이 검이 된다.
2022.02.24 -
차력하는 무예인은 누구?
차력. 1970년대. 누구일까요? 원로무예인들께서 답을 찾아 주셨습니다. 김용석 사범(대한민국무술연합회 소속 원력도 회장) 이 곳은 율산건설이 건립하던 강남터미널부지다. 자문 장만철 한국무예총연합회 상임고문과 최대식 대한궁중무술협회 총재
2022.02.24 -
이주방 화랑도
1960년대는 한국전쟁이후 한국무예태동기다. 화랑도의 창시자는 이주방은 1960년대 문교부에 화랑도를 등록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 현재 국내에 있는 화랑도협회와는 어떤 관계일까. 화랑도 무예에 대한 계보는 이주방 사범을 원조로 보고 있다. 그는 세계화랑도회를 미국 남가주에 개관했다. 1968년 5월27일 서울장충체육관에서 한국의 모든무도와 무술의 통합대회를 화랑도 이주방 태사와 합기도성무관 의 지한재 관장, 기합도 총재인 최대훈씨가 개최하고 화랑도의 이주방 태사와 이주상 국선이 대회를 주관하였다. 당시 1965년 공수도, 당수도, 태권도가 대한태권도 협회로 통합되어 국기스포츠가 되었던 것 같이 모든무술이 '대한무도회'로 통합 되었다. 당시통합된 무술로는 화랑도, 합기도국술관, 국기도, 비술, 기합도, ..
2022.02.24 -
강도관 조선지부
사진ㅇ디 뒷 배경은 일제시대 강도관 조선지부 중앙도장이다. 일제가 우리 왕실소유의 건물을 유도장으로 사용했다. 해방이후 수송동 조선연무관 이경석사범이 이곳으로 도장을 이전해 조선연무관으로 사용하며 유도와 권법부를 운영했다. 여기서 권법부는 연무관 태권도를 말한다. 이 도장은 한국전쟁후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 한국유도원, 대한유도회가 사용하게 되며, 연무관 태권도는 한국체육관으로 이전한다. 대한유도학교는 유도를 중심으로 교육했으나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이 학교 3회 졸업생이 미국 대학태권도 개척자들이 된다. 사진은 당시 연무관앞에서의 제4회 권법부 연무대회 기념 사진으로 단기4281(1948)년 6월 20일로 표기되어 있다.
2022.02.24 -
文과 武
대선 후보자들 토론을 보니 답답하다. 시간제한없이 진행하면 급방 들통난다. 해방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일부는 천황이 항복하던 날(사실인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영친왕이 한 말을 되새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조선과 일본은 다 같은 유교국가이면서도 일본은 尙武(상무) 정신을 발전시켜 무사도를 전통으로 삼았는데, 조선은 武(무)를 천시하여 文弱(문약)에 빠지고 文尊武卑(문존 무비)라는 폐습을 이어 오다가 결국은 武士를 존중하는 일본에 병탄당하고 말았소. 나는 언젠가는 우리 조상들, 즉 조선 王家(왕가)를 대표하여 文弱(문약) 풍조를 없애지 못하여 亡國(망국)을 초래한 잘못을 우리 동포들 앞에 서 깊이 사과하고 싶었소."(영친왕 1945) 이 말은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하면서도 했고, 안자산이 '..
202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