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2563)
-
이주방 화랑도
1960년대는 한국전쟁이후 한국무예태동기다. 화랑도의 창시자는 이주방은 1960년대 문교부에 화랑도를 등록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 현재 국내에 있는 화랑도협회와는 어떤 관계일까. 화랑도 무예에 대한 계보는 이주방 사범을 원조로 보고 있다. 그는 세계화랑도회를 미국 남가주에 개관했다. 1968년 5월27일 서울장충체육관에서 한국의 모든무도와 무술의 통합대회를 화랑도 이주방 태사와 합기도성무관 의 지한재 관장, 기합도 총재인 최대훈씨가 개최하고 화랑도의 이주방 태사와 이주상 국선이 대회를 주관하였다. 당시 1965년 공수도, 당수도, 태권도가 대한태권도 협회로 통합되어 국기스포츠가 되었던 것 같이 모든무술이 '대한무도회'로 통합 되었다. 당시통합된 무술로는 화랑도, 합기도국술관, 국기도, 비술, 기합도, ..
2022.02.24 -
강도관 조선지부
사진ㅇ디 뒷 배경은 일제시대 강도관 조선지부 중앙도장이다. 일제가 우리 왕실소유의 건물을 유도장으로 사용했다. 해방이후 수송동 조선연무관 이경석사범이 이곳으로 도장을 이전해 조선연무관으로 사용하며 유도와 권법부를 운영했다. 여기서 권법부는 연무관 태권도를 말한다. 이 도장은 한국전쟁후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 한국유도원, 대한유도회가 사용하게 되며, 연무관 태권도는 한국체육관으로 이전한다. 대한유도학교는 유도를 중심으로 교육했으나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이 학교 3회 졸업생이 미국 대학태권도 개척자들이 된다. 사진은 당시 연무관앞에서의 제4회 권법부 연무대회 기념 사진으로 단기4281(1948)년 6월 20일로 표기되어 있다.
2022.02.24 -
공부 안해도 대학가는 세상.
공부 안해도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대학 가는 시대다. 대학정원이 수험생보다 많다. 급감하는 대입수험생. 4년제대학 입학 미달과 지방국립대 학력저조와 중간이탈률이 증가하고 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그 곳 대학들이 무너질거라는 예상도 맞아가고 있고, 대학의 의지가 부족할수록 급속히 무너질거라는 예상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대학만의 문제가 아님을 많은이들은 알고 있다. 말로는 대학자율화라지만, 아직도 대학현장을 모르는 정책도 모순이고, 자율로 맡기기에 책임감이 떨어지는 대학들도 문제다. 언제부턴가 전문대에 있어야할 학과가 4년제에 있는가 하면, 4년제는 university 전문대는 college라는 영문표기로 눈가리고 아웅하는것도 웃지못할 정책이다. 대학이 무너지는 현상에 순서가 있다. 대학원 미달→학부..
2022.02.24 -
文과 武
대선 후보자들 토론을 보니 답답하다. 시간제한없이 진행하면 급방 들통난다. 해방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일부는 천황이 항복하던 날(사실인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영친왕이 한 말을 되새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조선과 일본은 다 같은 유교국가이면서도 일본은 尙武(상무) 정신을 발전시켜 무사도를 전통으로 삼았는데, 조선은 武(무)를 천시하여 文弱(문약)에 빠지고 文尊武卑(문존 무비)라는 폐습을 이어 오다가 결국은 武士를 존중하는 일본에 병탄당하고 말았소. 나는 언젠가는 우리 조상들, 즉 조선 王家(왕가)를 대표하여 文弱(문약) 풍조를 없애지 못하여 亡國(망국)을 초래한 잘못을 우리 동포들 앞에 서 깊이 사과하고 싶었소."(영친왕 1945) 이 말은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하면서도 했고, 안자산이 '..
2022.02.22 -
탐닉과 중독
어떤 일이든 집중은 하되 탐닉과 중독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 속에서 특정층들의 권위는 사랑도 애정도 아니다. 이미 그들은 탐익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그 탐닉을 버려야 이 사회가 변한다. 무술에서의 심적 군더더기가 탐닉이다. 생선회가 동해 것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해바닷가 출신들의 지나친 편견이고 탐닉이다. 생선회를 아는 사람들은 남해를 최고로 꼽는다. 그 다음이 서해, 그 다음이 동해다.
2022.02.21 -
가마솥
어릴적 밥내음이 진동하면 이 검은 솥에서 나는 냄새였다. 밥이 뜸이 들때면 고구마나 감자를 열기가 남은 숯더미에 넣어 구워 먹기도 하였으며, 남은 열기로 젖은 신발을 말리기도 했다. 솥뚜껑은 잔치날 지짐판이 되기도 했다. 넓은 솥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넣으면 온집안에 고소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매년 김장 이후 겨울 간식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솥뚜껑에 모래를 달구어 유과를 구워냈고, 솥안에는 하루종일 달인 조청이 가득했다. 학교를 다녀온 뒤 솥뚜껑을 열면 먹을 간식이 식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10살이 되면서 멈췄고 지금처럼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서울로 이사를 오니 부뚜막은 연탄불이 타고 있었고, 집앞에 구멍가게에는 간식거리가 즐비했다. 그리고 근처의 시장은 먹을것 천지였다. 무엇보다 검은 ..
20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