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Research Note(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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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훔쳐간놈들 가져와라!
마패(馬牌)는 역마(驛馬)의 지급을 규정하는 패로 발마패(發馬牌)라고 한다. 고종31년(1894) 갑오개혁과 함께 역마제가 폐지될 당시 마패는 상서원에 보관중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던 명나라 연호의 마패 700여개와 사용중이던 청나라 연호의 700여개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는 22개 정도뿐이란다. 민가에서 일부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마패들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가져가고, 6.25전쟁에 참가한 유엔군들이 가져가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발견된다..1960년대 조선시대 마패가 고갈되자, 외국인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마패를 유기점에 대량으로 주문해 조선호텔과 반도 아케이트 등에서 관광상품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위조품이 등장하기 시..
2021.02.14 -
조선 왕은 무를 천시하지 않았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는 3월 1일까지 열리는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 展'에는 무관복을 입은 철종의 31세 실재 모습이 공개되었다. 초상화와 나머지를 복원해 선보이고 있다. 조선시대는 정말 무武를 천시했을까? 임지윤(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YTN인터뷰(2021.2.13.보도)에서 "조선 왕조는 문반과 무반 두 계층이 공존하는 양반국가였고 조선 왕들 또한 무인이나 무예를 결코 비천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무관의 복식을 보면, 화려한 갑옷과 투구의 모습에서는 왕의 신변 보호에서 나아가 왕의 위용을 높이려는 목적이 강하게 나타나며, 신하들의 갑옷에도 용 문양을 썼다. 또한 조선은 군사의례를 통해 왕의 권위를 드높였고, 오방색 군사 복식을 통해서 왕의 군권 장악을 가시화했다는 논..
2021.02.14 -
'검도'라는 말 자체가 일본용어다.
우리나라에서 원래 '검도(劍道)'라는 용어는 없었다. 무예에 '검도'라는 용어를 쓰는 순간, 일본을 바탕으로 하는 용어가 되어 버린다. 전통무예라 하면서 '~검도'라 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국내 검도(Kendo)인들은 '예문지' 劍道(검도) 38편을 이야기하는데, 이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검도(劍道)'는 일본 검도인들에 의해 '격검(擊劍)'에서 변경한 명칭이다. '유술'이 '유도'로 바뀐 시기다. 이러한 명칭변경은 일본에서 중학교 교과서 과목으로 채택시키기 위한 일본무도인들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는 함부러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무작위로 일본무도가 우리 것과 구별되지 않는 묘한 현상이 생겨났고, 1980년대 전통무예의 용어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2021.02.10 -
온라인 무예올림픽 개최된다
Online World Martial Arts Masterships! Coming soon!
2021.02.10 -
정무체육회, 소림축구 원조?
곽원갑이 세운 정무체육회는 무술만 육성한 곳은 아니었다. 19세기말과 20세초 서양 문화의 유입과 함께 현대 스포츠가 상하이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무술로 돌아가는 스포츠, 시대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회원들의 관심을 충족시키는 정신에 따라 정무회는 점차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정무회는 무술 대회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뿐만 아니라 무술세계에서 선두였고, 다른 스포츠도 도시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일부는 국가대표급이었다. 1924년에 정무체육회는 축구팀을 설립했다. 정무 축구 팀은 고도로 숙련되고 의욕이 넘쳤으며, 국내외 선수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신중국의 1세대 축구 국가 대표팀이 된 Chen Chengda와 Fang Renqiu는 모두 정무축구대표팀의 선수였다. 1948년..
2021.02.04 -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중 1명으로 흑인이 있었다. 현재 모잠비크 출신으로 추정되며, 인도, 말레이시아를 거쳐 일본으로 왔을것이라는 추측이다. 야스케에 대한 기록을 보면, 키는 6척 2촌(약 188cm), 피부는 소처럼 검고, 열 사람 몫의 힘을 내는 장사라고 알려져 있다. 오다노부나가는 야스케에게 무사의 신분을 주고 가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야스케는 혼노지의 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잃자 니죠 성(二条御所)의 오다 노부타다군(軍)에 합류하여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 이후 사로잡혀 남만사(南満寺)로 추방했다고 기록은 있으나 확실치 않다. 아래는 추정 그림.
202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