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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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진흥사업,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통무예진흥기본계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국내 상황을 인지했을까? 조금전 중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상이상의 예산이 각 성별로 책정되고 있다. 무예와 관광, 전통문화와 관광 등으로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이야기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림사하나로 덩핑시를 키웠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하나가 아니라 전국 단위다. 국내에서는 아쉬운점이 많다. 무예계는 작은 밥그릇을 놓고 탐하는데 매몰되어 있고, 밥그릇이 아닌 것을 밥그릇으로 만드느라 애쓰고 있다. 어렵게 지자체를 중심으로 일궈 놓은 국제무예세계도 잔치를 앞두고 치워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막대한 예산과 계획으로 무예진흥을 시작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어떠한 정부가 들어서도 무예는 뒷전이었다. 이유..
2024.01.20 -
일본강점기 조선궁술을 인정한 이유
1922년(1928검토중) 조선궁술연구회가 황학정에서 발족했다. 1926년(1932 검토중)조선궁도회로 개칭했다. 해방이후 조선궁도회가 부활되어 1948년 대한궁도협회로 개칭하고, 1954년 대한체육회발족과 함께 정식종목으로 가맹되었다. 대한궁도협회는 1962년 양궁을 도입했고, 1963년 국제양궁연맹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83년 대한궁도협회에서 분리하여 대한양궁협회가 결성되었다. 이것이 대한궁도협회의 역사다. 1938년 조선체육회는 일제가 만든 조선체육협회에 강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1940년 대한궁도회가 조선체육협회에 가맹되었다는 보도자료다. 궁도가 스포츠로 처음 가맹된 것은 일제하에 있던 조선체육협회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체육협회는 일본체육협회를 모델로 1919년 2월 3.1운..
2024.01.20 -
유도장있음을 자랑하라
1924년 시대일보의 1면에 나온 칼럼이다. 이 칼럼을 보면, 일제강점기 운동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서구스포츠가 유입되고 일제의 무도가 유입되던 시기인 만큼, 마라톤만이 인기있을때 유도와 격검(검도)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돈이 필요한 만큼 독지가들의 지원없이는 힘든 상황으로, 유도장 하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운동계는 학교간 대항전, 그리고 조선인으로서의 우수함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인의 능력으로 일본인과 겨루어서 이겨야 하고, 올림픽에 출전해 입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유도의 기원을 따지고, 격검(검도)의 기원을 따지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유도장이 있다는 것은 운동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일본인들과 ..
2024.01.20 -
남산 주자골에서 유술을 배웠다.
1903년 유술회와 관련하여 신문기사가 나왔다. 동경에서 온 쿠로이와氏가 1902년부터 서울 중구 주자동(예장공원 부근) 일본인 야학교에서 일본인 소년들과 헌병들을 모집해 60여명에게 유술을 지도했고, 조선인 중에서 희망자 25명내외를 모집한다는 기사내용이다. 그동안 국내 유도 유입과정은 1906년 일본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1874∼1937) 5단이 서울 명동에 다다미 30장으로 유도장을 개설한 것이 처음이라는 주장을 뒤집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술은 강도관유술인지, 대동류합기유술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2024.01.20 -
격검을 잘했다는 한모 순사보는 누구인가?
1910년 10월 창덕궁 비원의 영화당앞에서 격검과 유술대회가 개최되었다. 경찰관들이 주최한 것으로, 순종왕이 관람하였고, 조선총독부의 무관이었던 이시이이(石井)와 경무총장 아카시(明石), 전 궁내부 차관이었던 고미(小宮) 등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다. 격검에는 한(韓)모라 칭하는 조선순사보의 기능이 뛰어 났고, 유술에서는 일본인들중에 기묘한자가 많았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1896년 경무청에서 치안목적으로 일본에서 도입해 격검을 채택했고, 1904년에는 육군연성학교에서 교과목으로 격검을 채택하였으며, 1908년에는 최초로 한일순사격검대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때 조선인 순사보가 격검에서 뛰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1906년에 학교에서도 검도를 가..
2024.01.20 -
천하장사 황대웅
천하장사 황대웅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대학입시 실기시험때 처음 보았다. 기초체력 테스트에서 100m달리기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잘 달렸다. 가속도가 붙어 학교 도로까지 치고 올라갔다. 당시 우리 동기들중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대학에 합격해 동기가 되었지만 삼익건설팀으로 진출해 민속 프로선수로 전념했다. 천하장사도 되었고, 백두장사도 하면서 이만기시대를 마감시키는데 강호동과 함께 했다. 강호동도 입학은 했으나 황대웅처럼 프로생활을 하느라 학교는 제대로 다지 못했다. 두 선수가 씨름계 라이벌로 이름을 날릴 때니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을거다. 잘 생기고 몸짱이었던 황대웅선수가 씨름계에서 은퇴후 사라졌다. 사업을 한다는 소릴 들었고 이래저래 산다는 이야기를 간혹 들었다. 그리고..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