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Sports(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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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감독 별세
한국 프로야구 첫우승 감독인 김영덕감독님이 향년 87세로 돌아 가셨다.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1956년부터 7년간 투수로 활약했다. 1964년에 한국 실업리그에 들어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국내를 평정했다. 고인의명복을빕니다
2023.01.27 -
중국이 e스포츠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오래간만에 아들 녀석과 오랜 시간 동안 게임세계로 대화를 했다. e스포츠시장은 중국이 지배하는 모양새다. 종목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개발된 배틀그라운드. 하지만 이 역시 모바일은 중국이 거머쥐었다. 이렇다 보니 최근 pc용 설날 스킨을 보면, 중국콘셉트로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한복을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올해는 사신도와 중국인들의 전통댄스 모션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한복과 함께 등장했던 중국 복식과 무예 동작 등은 아직도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e스포츠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중국과 경쟁에서 뒤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은 인구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실제 그렇지는 않다. 바로 정책의 한계다. 미국, 일본, 중국은 e스포츠를 '육성'정책이었던 반면에, 우리는 '규제'정..
2023.01.21 -
일제강점기 스포츠정책
한국의 식민지 역사와 스포츠 역사에 관한 연구는 전통적으로 식민지 시대 스포츠의 성격을 '민족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넓은 의미의 저항 수단으로 해석해 왔다. 일본의 일부 연구에서는 식민 정권이 스포츠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조사했다. 처음에는 1920년대에 두 나라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을 장려하기 위해, 그리고 1937년 이후에는 동화 정책을 위한 도구로 되었다. 한국에서는 1910년 일제 강점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 몇몇 한국 지식인들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서구 체제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특히 건강하고 강력하며 자주적인 한국을 건설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으로 스포츠를 주창했다.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한국 사회는 '제국 시대에 서구 문화가 사회 선진화를 위한 도구로 적..
2023.01.10 -
배틀그라운드에 이소룡이 등장한다.
온라인세계무예마스터십 e마샬아츠에 배틀그라운드가 채택될 수 있을까? 최근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에 전설적인 액션 스타 이소룡(리샤오룽, 브루스 리)이 등장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은 브루스 리 패밀리 컴퍼니와 파트너십을 맺고 이달 진행될 2.4 업데이트를 통해 ‘무술 대회 테마 모드’와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아이템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용자들은 ‘무술 대회 테마 모드’에서 무술 콘셉트의 다양한 인게임 요소들을 즐길 수 있다. 또 10일부터 ‘쿵푸의 혼 세트’, ’격투의 힘 세트’, ‘쿵푸 선생 세트’ 등 이소룡 테마의 신규 복장 세트와 팀 이모트, 자동차 스킨, 낙하산 등의 아이템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2023.01.05 -
우리는 스포츠강국이었다
근대 조선의 스포츠는 강함이 있었다. 근대스포츠의 출발과 조선의 근대스포츠유입은 비슷한 시기다. 어쩌면 아시아에서 서구스포츠 유입이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이 것이 우리가 스포츠강국으로 갈 수 있었던 저력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럭비우승팀인 경성사범학교, 일본에서 개최된 1931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시상대에 오른 럭비팀, 우승기는 경성사범학교 주장인 류혜택(柳恵沢)이라고 한다. 이 때가 경성사범학교 럭비부 창단 3년차였다. 스크럼 안정시켜 볼 지배율리 높았고, 밀집전에서도 우위를 보여 돌파력과 패스도 뛰어나 일본 명문팀 천리중을 결승에서 이기고 우승했다고 당시 언론은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럭비도 잘 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조선은 스포츠기량이 뛰어 났다. 시스템은 어땠을까? 일..
2022.12.31 -
필치성, 미국에서 스타투수가 된 이유는?
한국의 야구역사연구도 할 일이 태산이다. 1910년대부터 미국 야구의 해외 투어에서, 조선의 야구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지금 한국 야구의 저력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석전으로 다져진 투구력은 투수 강국일수밖에 없는 이유일까?? 그 중에 미국사회에서 이름을 날렸던 필치성 선수 이야기를 찾았고, 계속 찾고 있다. 1912년 하와이 호놀루루에는 한인팀과 하와이 야구팀이 야구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23년 또다른 한인 야구팀이 나타난다. 순수 한인들로 구성된 팀이다. 필치성이라는 한인 선수가 미국 언론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9살 되던해 하와이로 이주해, 19세때 퍼시픽 칼리와 (24세때는 오레곤대학의 스타투수였다. 그의 첫 대학 경기는 18삼진 무안타, 2학년 때 경기당 평균 1..
202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