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최초의 한인 프로선수는?

2010. 12. 28. 22:48Report/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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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7.17 동아일보 기사. 여기에는 처음으로 일본직업선수로 스카웃제의를 한 기사가 나왔다.

1924년 대구 계성중학에서 서울 배재고보로 스카우트 된 이영민.
그는 1925년 조선육상경기대회 400m에서 54초6의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조선 축구대표에 선발됐을뿐 아니라 경평(京平)축구에 선수로, 훗날에는 감독으로 출전할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가진 만능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배재고보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한 이후 야구에만 집중했는데, 야구에 입문한 지 얼마되지 않아 뛰어난 기량을 보이게 된다. 타자로 주로 활동한 이영민은 연희전문학교 소속이던 1928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최 야구 대회(연희전문과 경성의전의 정기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식 경기 홈런을 기록했으며, 그 대회에서 타격왕이 되었다. 그후  일본야구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미국 직업 야구단과의 경기에도 출전하는 등, 19세기 후반에 한국보다 먼저 야구단을 창단하여 활동했던 일본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기량으로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의 "천재 야구 선수"로 알려져 있다. 학창 시절에 조선축구 대표 선수로 선발되기도 하였던 그는1933년 창단한 경성축구단에서도 선수로 뛰는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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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에서 1호홈런을 치고 찍은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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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전조선야구협회 이사장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활발한 야구 관련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야구 발전에 공헌했다. 해방이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48년 런던올림픽에 조사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체육계의 활성화를 위한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1950년 일본에서 열린 넌-프로 (Non-Pro) 야구 회의에 한국댚로 참가했으며, 1954년에는 대한야구협회(KBA) 부회장과 아시아야구연맹(BFA)의 대한민국 대표를 지내는 등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한 기초 마련에 크게 공헌했다.

1954년 셋째 아들의 친구가 쏜 총에 맞아 불의의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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