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에 왜 그림이 없지?

2021. 4. 6. 10:25Report/Research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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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자산어보>가 대박을 예고한다. 주변에서 이미 영화를 본 이들이 여러 평을 하며 추천한다.


홍어를 생각하면, 늘 <자산어보>가 떠오른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쓴 생물학 원전이다. 그래서 논문과 글들을 찾아 보았다. <자산어보>에 담긴 또하나의 의미, 조선이 文을 숭상하면서, 또 한계를 보인 성리학의 문제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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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한 신해박해로 인해,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정약용은 해남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전은 생물학자의 기질이 있었다.

정약전 - “동생, 해족도설이란 걸 지어볼까 하네”
정약용 - “형님, 글로 자세히 쓰시고 그림은 그만두시지요.”


전근세 해양사 분야의 권위자인 김문기 부경대 교수는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해족도설(海族圖說) - Jasan-Urbo and Haejok-doseul : The Divergence of Natural History about Fishes in Early Modern East Asia’ (2016)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해족도설(海族圖說)>은 서로 다른 책이 아니라, 둘 다 정약전이라는 한 사람이 지은 같은 책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다를까? 앞의 형제가 나눈 편지내용에 의하면, <해족도설>은 애초에 구상했던 책의 제목이고, <자산어보>는 방향을 틀어 최종 완성된 책의 제목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은 ‘문자(文子) 우위의 문화’라는 시대환경이다. 정약용은 <해족도설>을 구상했던 정약전에게 학문의 종지를 지키라고 충고한 것이다. 효제라는 유교덕목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학문의 종지였다. 정약용은 윤리학의 입장에서 생물학을 지향했던 형인 정약전을 경계한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이 현실의 성리학 질서에 어떤 교훈을 주고 기여할 수 있는가였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의 이런 의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는 윤리학자이기보다는 생물학자이기를 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김문기 교수는 <자산어보>는 조선 문명이 청각적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으로, ‘청각’과 ‘시각’의 갈림길에 선 조선의 선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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