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도 택견은 있었다

2013. 2. 24. 00:11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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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우리의 전통무예가 단절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다만, 해방이후 일부 무예인들의 구술에 의한 것들과 한국체육사의 해방이후 초기 학자들의 주장뿐이다.
과연 일제는 우리의 전통무예를 탄압하였는가? 그렇다면 택견, 활쏘기, 씨름이 존재하지 않았는것인가?
하지만 실제 일제시대에도 있었다. 택견이 존재했었고, 활쏘기는 사정별로 존재해 활발했다. 씨름도 마찬가지다.
다만, 일본무도가 유입되면서 하는 이들이 서로간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도나 유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경찰, 학교, 군 등에서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일반인들이 보는 편견일수도 있다.
지금 우리 무예계는 일제시대를 거론하며 일제때 단절되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무예들은 신생무예들이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특히 택견계에서 흔히 일제의 전통무예말살정책으로 인해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일제시대의 택견은 없었던 것인가?


1928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5면의 기사다.
'인천무도성황'이라는 주제로 인천무도관창립1주년기념 무도대회이야기다.
1928년 7월 1일 천외리애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당시 인천무도관창설자가 강제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연설이 끝나고 개최된 무도시합에는 각종 무도시합이 있었고, 그 중에서 최종경기에서는 택견의 권충일과 권투의 나주연을 인기있는 선수로 꼽았다. 여기서 택견의 '권충일'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좌측의 기사는 1930년 2월 26일 동아일보 7면의 '내 몸내운동으로 튼튼히 하자는 주제로 쓴 글로 마치는 글 부분이다.
여기에는 당시 제1 널뛰기, 제2 씨름, 제3 장치기, 제4 그네뛰기, 제5 줄다리기 가 있고, 이외에 평양에 '날파리', 서울에 '택견', 함경도에 '뭉구리가 있다고 했다. 이 중에서 날파리, 택견, 뭉구리는 무예다. 특히 택견은 서울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1934년 12월 27일 동아일보 5면에 게재된 '흑두건'이라는 연재소설이다.
하단부분에 "당신이 소문을 들으면 아우 어디가서 소문이라고 들어 온다는게 어느날 어디서 쌈이 있다는둥 택견이 있다는 둥 어디서 대가리 둘달린 ......"라고 하여 택견이 등장한다. 시대상황은 고전일지 모르지만 당시 작가는 택견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연하게 택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론할 수 있다.

1938년 4월 11일자, 5월 19일자와 30일자에 게재된 '만향'이라는 역사소설에는 '택견'과 그림이 등장한다. 
그림은 1938년 5월3일자 3면의 내용으로 당시 택견을 '활해극'이라고 불린 흔적도 보인다. 

일제시대에 명칭은 '택견'으로 불리었고, '태껸'이나 '택껸'의 흔적은 없다. '활해극'이라는 말 역시 역사소설 만향에만 나올뿐 다른 기사는 없다. 왜 택견의 흔적이 이렇게 부족한가? 실제 택견을 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택견을 한 사람들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권투나 유도 등에 더 관심이 많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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