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석과 근대학교 무예반

2020. 7. 9. 21:01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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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원산학사는 원산소학교로 변경된다. 사진은 원산소학교 전경 

원산학사와 동래무예학교

정현석(1817~1899)은 고종때 관료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여러 부분에 뛰어난 관료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원군수를 시작으로 김해부사, 동래부사, 덕원부사를 역임하면서 지역민과의 유대관계가 뛰어나 고종에게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1867년부터 6년여 동안 동래읍성 수축과 군사조련 등으로 철저한 대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위성척사론자로서 공이 컸고, 호국의지가 강했던 관료이면서 조선후기의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진주목사로 부임해 진주교방에서 익히는 춤과 노래, 그리고 풍습을 바로잡기 위해 엮은 '교방가요'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며, 최초의 근대학교 설립과 이 학교에 무예반을 설치해 무관을 양성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는 1883년 함경남도 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元山學舍)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초의 근대학교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개신교의 영향으로 세워진 학교들이 근대학교의 효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당시의 학생을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나누고, 정원을 처음에는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했다. 교육과목은 공통과목으로서 시무(時務)의 중요한 과목으로 산수와 물리부터 각종 기계기술, 농업, 양잠, 광산채굴 등을 가르쳤고,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병서와 사격술을 교육했다. 교육기간은 처음에는 1년을 단위로 했으나 뒤에 소학교 기준으로 연장됐다.

원산학사보다 5년 빨리 동래부(東萊府, 부산에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무예학교(武藝學校)'가 존재했다. 최근의 문헌들은 체육사나 무예사에 한 두 줄 인용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이 학교의 존재에 대해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원산학사를 개교하는데 공헌한 사람이 정현석이고 동래 무예학교를 설립한 이도 동일인이었다. 이 두 학교의 설립자인 정현석은 관과 민의 협조로 근대학교인 원산학사를 설립했다. 사학(私學)형태로 무예학교는 동래부사였던 시절에, 원산학사는 덕원부사(덕원부 안에 원산에 있었음)로 재직할 때 개교한 것이다

동래무예학교, 근대학교의 시초

지금 부산에서 무예학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직 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예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동래부는 무청(武廳, 치안과 군사를 담당하던 관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이 시기가 무예학교를 만든 정현석이 동래부사로 재직할 시기인 만큼 동래부 동헌(東萊府 東軒,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421-56번지 일원)부근의 시설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동래부의 경우 일반 군현과는 달리 국방의 요충지였던 만큼 무청은 중군청, 군관청, 교련청, 장관청, 수성청, 별무사청, 도훈도청과 같은 8청이 있었다. 소규모의 무청도 많았다는 점에서 무청 중 하나를 무예학교로 지정해 교육했을 가능성이 높다.

체육사 연구자들에게도 동래무예학교는 인용되고 있다. 한양대 이학래 명예교수가 쓴 '한국체육사'에서는 무예반의 경우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芻,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도 했다고 주장했다. '승정원일기'의 고종의 기록에는 기추(騎芻)의 경우 응시자가 흔하지 않거나 소수에 불과했고, 실시한다 해도 소수인원이 합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예학교에서 이를 집중 육성했을 수 도 있다. 하지만 당시 여건상 이러한 교육과정보다는 사격술과 병술에 치중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예반은 무비자강의 실천

정현석은 왜 무예반에 애정을 쏟았을까? 당시 일본의 무력 위협이 수시로 자행됐기 때문에 1883년 8월에 원산학사의 무예반 자격을 위해 직접 정부에 보고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같은해 10월 정부에서 승인되어 원산학사 무예반의 졸업생들은 하급 장교인 별기군으로 선발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원산학사는 무사로서 무예반에 지원하는 이들에게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락했고, 200명을 정원으로 선발해 교육과 훈련을 시켜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했다. 별군관은 조선 후기 장신(將臣)들의 전령이나 사환을 맡았던 하급 장교로 원래는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을 얻지 못한 자나 한량(閑良) 가운데 무예에 기량이 뛰어난 자를 임명했다. 이들은 궁성 밖을 순찰, 감독했으며 지방의 진(鎭)이나 둔(屯)에 교대로 파견되기도 한 군관이었다.

이러한 근대학교의 무예반은 동래무예학교의 경우 무예교육을 통해 근대의 관문이었던 동래 개항장에서의 일본과의 충돌에 대한 대비책이었으며, 원산학사는 별군관으로서 궁성과 각 지역의 군관으로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는 인재를 양성한 것이다.

이처엄 정현석은 동래무예학교의 사례를 그대로 원산학사에 이어 받아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후기 문(文) 중심의 교육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교육으로서 무(武)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실천한 것은 현실주의적이며 창의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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