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유년학교 생도들 일본으로 유학간 이유

2011. 10. 25. 11:03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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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 21일 황성신문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는 대한제국 때에 설치되었던 초등군사교육기관이다.

"陸軍幼年學校官制를 반포하다. "(日省錄 光武 8年 8月 18日, 高宗實錄 光武 8年 9月 24日, 官報 光武 8年 9月 27日 號外)

 
1904년 9월 무관생도(武官生徒)가 되는 데 필요한 보통학과 및 군인의 예비교육을 행하여 육군의 각 병과의 무관학도가 될 인원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취학연령은 15세부터 19세로 하고 수업연한은 3년으로, 이를 졸업하면 무관, 즉 장교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그들의 유년학교를 모방, 설치된 것으로 당시 대한제국으로서는 실제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재정상으로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제는 이 유년학교교육을 통하여 일본식 군인정신을 주입하고 그들의 주구로 활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실제 유년학교를 졸업하여 무관에 임명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허구에 불과한 제도였다.

이상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한국군제사(韓國軍制史)-근세조선후기편(近世朝鮮後期篇)-』(육군본부, 1976)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3- 3((송병기 외 -국회도서관, 1971)

하지만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고종이 일본에 대한 강한 대한제국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유년학교를 모방해 이를 지원했을거라는 주장도 있다. 1909년 무관생도중 일부를 일본에 유학을 보내는데 이들의 일부는 지금도 친일 인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당시 대한제국의 힘을 만들기 위해 고종이 파견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관들의 유학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유소년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친일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였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일제시대 성인이되어 친일행각을 한데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래 명단중 김석원(金錫源)은 지금의 대방동에 소재한 성남중고등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의 초기 취지는 유년학교나 소년사관학교를 모델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필자가 이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학창시절 교련수업을 강조했던 것과 학교의 분위기가 사관학교와 다를바 없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해 문득 김석원 설립자의 인물에 대해 70세가 넘은 외교관출신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고종이 일본에 무관생도를 유학보낼 당시 김석원 설립자도 그 중 한명이었고, 초기 유학생파견에는 고종의 남다른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는 운을 남긴바 잇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1909년 9월 2일 정부문서에 무관생도중 일본유학자 명단이 있다. 당시 친위부장관이었던 이병무가 발송자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 무관생도 중 일본유학자 명단
문서번호 通報  
발송일 隆熙三年九月二日(1909년 09월 02일) 
발송자 親衛府長官 李秉武  
접수일 隆熙三年九月四日 接受 第四七五號  
수신자 內閣總理大臣 李完用 閣下  
결재자 總理大臣 書記官長 局長 課長  

武官生徒를 隆熙三年七月勅令第六十八號에 依야 日本에 留學을 命옵기 該名簿 玆에 別紙通報홈.
前陸軍武官學校留學生連名簿

廉昌燮 劉升烈 李應俊 趙喆鎬 洪思翊 權寧漢 安鍾寅 李殷雨
池錫奎 申泰英 李昊永 朴勝薰 閔德鎬 張錫倫 金鍾植 柳寬熙
金埈元 徐廷弼 柳春馨 白洪錫 南相弼 姜友永 金錫源 李種赫
李喜謙 張璣衡 張裕根 鄭東春 張星煥 李絳宇 李東勛 申佑鉉
元容國 朴昌夏 李應涉 尹佑炳 尹相弼 閔丙殷 金重奎 李敎奭
南炱鉉 金仁旭
已上 四十二人
親衛府長官 李秉武 內閣總理大臣 李完用 閣下 總理大臣 書記官長 局長 課長 隆熙三年九月二日 隆熙三年九月四日 接受 第四七五號 親第一五號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기서 잠시, 이병무에 대한 인물을 알아본다.

1864(고종 1)∼1926.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1884년(고종 2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ㆍ친군통위영대관(親軍統衛營隊官)ㆍ훈련원주부를 거쳤다. 1894년 친군장위영좌대우참령관ㆍ동영우대부령관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보빙사(報聘使) 의친왕(義親王) 강(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 육군교도단에서 수업하였고, 이듬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졸업하였다. 귀국 후 육군보병정위로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육군보병참령(陸軍步兵參領)ㆍ무관학교교두(武官學校校頭)ㆍ북청진위대대대장ㆍ진위 제5연대 2대대 대대장 등을 지냈다.

1904년 고군산으로 유배당하였으나 곧 징계를 면하고, 육군무관학교장 겸임 육군유년학교장이 되었다. 1905년 보병정령ㆍ군부교육국장ㆍ육군참장ㆍ칙임군부교육국장(勅任軍部敎育局長)이 되었고, 이듬해 훈3등8괘장(勳三等八卦章)을 받았다.

또 보빙사 완순군(完順君)을 수행하여, 일본정부로부터 훈2등서보장(勳二等瑞寶章)을 받은 뒤 귀국하였고, 진위대검열사가 되었다. 1907년에는 이완용내각의 군부대신임시서리시종무관장으로 고종 양위와 군대해산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한 공로로 정2품으로, 2개월 뒤에는 종1품으로 특별승자(特別陞資)되었고, 훈2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과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욱일장(勳一等旭日章)을 받았다. 1909년 친위청장관ㆍ시종무관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授章)을 받고, 일본의 한국병합에 적극적으로 동의, 협조하여 자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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