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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은 왜 바위에 낙서를 했는가?

SOMARI 2025. 6. 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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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1939년 일제가 글을 새겨놓은 바위( 사진(시사저널,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오른쪽은 해방이후 삭제한 이후 모
좌측은 제15회 大日本靑年團大會今日開幕(대일본청년단대회금일개막)이라는 제목의 1939.09.17조선일보 2면 , 오른쪽 사진은 1936년 8월 5일 제7대 조선총독에 오른 미나미 지로(왼쪽). 오른쪽 양복 차림의 인물이 조선 정무총감이었던 오노 로쿠이치로다.(해설-월간중앙)

바위에 낙서한 녀석들! 뭐든 흔적을 남기려 애썼던 녀석들! 그 녀석들의 꼬붕짓을 하며 빌어 먹던 녀석들도 바위에 낙서하기를 좋아한다. 1939년, 그해 가을에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되었다.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사업중 하나로 인왕산 병풍바위('치마바위'라고도 함)암벽에 기념각자(記念刻字)로 남겨 놓았다.

경성 이마에 글을 새겨놓는 악랄한 행위를 한 것이다. 해방이후 이 글자들을 지우는 사업을 해 현재는 지운 흔적만 남아 있다. 사진은 지금의 자선당 터 자리에서 담아낸 풍경으로 근정전 지붕 너머로 인왕산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어디에서나 쉽사리 올려다 보이고, 그 전면에 크고 널찍한 암벽을 갖추고 있는 탓에, 이곳은 끝내 일제에 의해 기념각자(記念刻字)가 새겨지는 수난의 공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는 청일전쟁 승리로 아시아 패권국이 되었다. 이에 미나미 조선총독은 ‘내선일체’를 위한 치밀한 계산을 하게 된다. 조선 청년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기반 확보라는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탄생한 조직이 조선연합청년단이다. 조선연합청년단은 1939년 2월 16일 대일본연합청년단에 정식으로 가입 수속을 완료했다. 1939년 5월에는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이후 ‘대일본연합청년단 제15회 대회’는 1939년 가을 경성에서 개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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