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戊戌) 무술(武術)

2018. 1. 9. 16:02Report/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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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무예 움직임으로 표현한 무예전문 이진혁 작가의 ‘무술(戊戌)무술(武術)’



무술(戊戌)은 육십 간지 중 35번째로 '()'는 황()이므로 '노란 개의 해'라고 하여 황금개띠의 해라 불린다. 무술(戊戌)과 무술(武術)은 우리 말로 같은 음이다 보니 무예계에서는 올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평창동계올림픽이나 6월에 있을 지방선거의 관심, 그리고 마케팅계의 개띠 마케팅이 유행하는 것처럼 새해들어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성장을 바라고 있다. 역술인들도 동서남북 주변국의 조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운이 2018년 무술년에 좋은 결과로 나올 것이라는 호운이며, 고생하고 꿈꾼 만큼 이루어지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희망적인 한 해로 보고 있다.

 

무술(戊戌)년 무술(武術)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무술년의 역사적 사건은 698년 발해건국을 시작으로 1418년에는 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고, 1658년에는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2차 나선정벌에서 우리 군이 사격술과 전술을 과시하였으며, 1598년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계기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낸 해이다. 무엇보다 무예와 관련해서는 1778년 정조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정조의 개혁 의지는 무술년이던 17786월에 발표한 경장대고(更張大誥)에 담겨 있다. 여기서 경장개혁을 의미하며, ‘경장대고는 개혁을 하기 위해 국왕이 제시한 큰 정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군사제도 개혁중 하나가 표준화된 무예체계 정비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각 군영의 무예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군영마다 명칭과 훈련체계가 달랐다고 한다. 이 무예체계 정비는 각 군영의 군권을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체계를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정조는 한성의 주요군영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용호영의 훈련체계를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1785병학통이 편찬되었으며, 다음 해인 1789년에는 무예도보통지편찬을 명하여 1790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인재등용방식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다. 과거시험에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로 구분되었는데, 무술년 1838년은 무과에서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문과에 3명을 선발한 반면, 무과에 71명을 뽑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술년 1838111() 비변사에서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효종에게 봄가을로 강무(講武)하여 군병(軍兵)을 조련하고 만약을 대비하자고 제안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대표적인 활터는 황학정(黃鶴亭)이다. 이 황학정은 1898년 무술년에 고종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경희궁 내 '회상전(會祥殿) 담장에 있던 활터를 말한다. 한때 고종이 이곳에서 직접 활쏘기를 하였던 곳으로,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고종의 모습이 노란 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황학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활터는 1922년 일제가 이곳에 학교를 짓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서울 사직공원(사직단) 북쪽 인왕산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활쏘기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유일하게 황학정만이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대한제국 왕의 활쏘기 장려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당시에 개혁의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같은 해 황국협회 설립은 독립협회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관청과 관련을 맺으면서 단결이 잘 되는 부보상을 동원하여 민중집회를 물리적으로 훼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무관학교 출신의 길영수를 비롯하여 홍종우와 이기동 등이 각 처의 보부상들을 규합해 협회를 설립하는 등 혼란의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 무술년인 1958년은 한국전쟁이후 재건과정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격동의 시대였던 이 시기의 현대사는 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며 ‘58개띠라는 말이 거의 관용어로 굳어졌다. 사상 최고의 출산율인 6.3명을 기록하며 지금도 전체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현대사의 주역들로 불리기도 한다. 1973년 이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생겼고, 1977년 본고사를 끝물로 역대급 경쟁률로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대학에서는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시기 무예는 사회 안정을 담당하던 경찰과 교도관중심의 수련과 대회가 주를 이루었다. 경찰의 날을 기념한 전국경찰무술대회가 개최되었고, 19585월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시범경기였던 유도종목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승부로 비겼다. 당시에 출전한 유도선수는 우리나라가 2, 일본이 6, 대만이 4명이 경기를 하였다. 이 대회에 유도 감독은 이제황 당시 대한유도학교 교장(, 용인대)을 비롯해 이석국, 권용우, 김위생, 서정현 선수가 국가대표로 선발돼 권용우와 이석도가 출전한 것이다.

 

무술경관들로 구성된 국회경위 사건을 다룬 당시의 신문



그러나 현대 무예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다. 국회 경위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무술경관들이 관여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동아일보, 1224일자)에는 195812월 지방 각 경찰국 소속의 무술경관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국회에서 농성투쟁중인 긴박한 상황에서 무술경관들이 투입될 것과 경북과 경남 경찰국에서 유도특기 경관 70여명과 전남과 전북경찰국에서도 차출되어 서울에 집결한다는 기사다. 당시 자유당에 의해 신국가보안법안을 반대하던 야당의원들의 국회 농성과 관련이 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해인 19593월에는 3백여명의 무술경위(당시 무술경관들로 구성)들의 완력에 의해 야당의원들을 제지하고 법을 통과시켜 무술경관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술경위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무예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건이다.

 

2018년 무술년 무예계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청사건립이 시작된다. 유네스코의 무예를 관장하는 재단이 설립되고 1년이 지난해인 만큼 전통무예의 활로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국립무예진흥원 설립을 위한 정부의 사전조사가 이루어진다. 이미 학술용역에 대한 국비가 확보된 상태여서 무예인들의 희망인 (가칭) 국립무예원 청사의 목표가 설정될 것으로 보인다. , 2019년 개최될 충주세계무예마스터십의 조직위원회가 연 초에 발족해 대회준비에 들어가며, 2021년 제3회 세계무예마스터십 유치도시의 윤곽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전통무예진흥법의 개정을 통해 무예단체의 국비 또는 지방비의 지원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무예계의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역대 무술년은 변화와 개혁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많은 부분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해 이기도 하다. 무술년은 정치와 경제 측면에서 기운이 밝아 사회 전반 분위기가 좋아지며, ()의 기운이 강해서 새로운 시도와 변화가 많은 해하고 보고 있다. 무술년, 무예계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예단체들의 단합과 무예진흥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10년간 잠자고 있는 전통무예진흥법도 이제는 깨워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제 무계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창출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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