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Martial Arts2011.01.0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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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원빌딩내 있던 유도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Apple | iPhone 3GS | Normal program | 2010:07:06 19:28:35

한국유도원전경


1918년 설립된 재단법인 강도관 조선지부의 후신이었던 여의도의 한국유도원이 매각됐다

서울 소공동에서 시작돼 1995년 여의도스포츠센터로 변신했던 유도원이 경영난의 이유로 이제 여의도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올초부터 경영난을 이유로 매각에 대한 소문이 있었고, 지난 10월에는 유도원매각을 반대하는 위원회까지 생겼지만 최종 매각된 사실이 최근에 알려져 유도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땅값만 해도 600억원이 넘는 유도원을 450억원에 매각한다는 사실을 놓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난 11월 금융계에 따르면 한국유도원은 지난달 위탁관리 리츠인 '코크렙제17호'와 여의도 유도회관 건물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고 발표한바 있다. 코크렙제17호는 유도원 건물을 리모델링해 순수 업무용 빌딩으로 운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유도원은 소공동 시절 대한유도회, 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 연무관 등이 함께 하던 한국무도사의 중요한 사적이기도 하다. 그동안 맴버쉽으로 운영되어오던 여의도스포츠센터회원들이 최근 몇해전부터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경영난이 있었다고 한다 .
 
소공동시절부터 여의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도계의 갈등을 유발시켰던 유도중앙도장인 한국유도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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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5.17 16:47

유도회 김정행회장선출 통합 활기

1995년 유도회의 전임회장이었던 두산그룹 당시 부회장은 국제유도연맹(IJF)회장으로 피선되고, 같은해 11월 박회장의 공백을 용인대 김정행총장이 유도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국제기구의 수장과 국내단체의 수장이 유도회의 임원들중에서 선출되면서 1996년에 이르러 유도회와 유도원은 급변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면서 대립관계였던 양단체는 통합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분위기는 유도원이 이사회에서 유도회가 추천하는 6명의 이사를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에 대해 유도회가 수락한 것이다. 유도원은 유도회를 경기인 출신인 당시 용인대 김정행 총장이 맡게 됨으로써 두단체의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기존 유도원의 이사 9명외에 6명의 이사를 유도회의 추천인사로 받아들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유도회 내부에서는 박 전회장이 국제연맹 회장직으로 이동하면서 경기인 출신인 김정행 총장이 운영하는 유도회의 제정적 문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실제 연간예산의 절반가량을 박전회장의 찬조금으로 충당해 왔던 유도회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회는 유도원과의 통합문제와 관련해 김재현 유도원이사를 부회장으로 영입하면서 활로를 모색했다. 또, 유도회의 김회장은 이사회에서 부회장 2명과 아시 4명을 보강했다. 이 당시 김회장이 집행부의 강화를 위해 세운 방침은 부회장에 윤양하(영화인), 김재현(유도원 이사), 신임이사에는 김형원(욱사 강사), 한성철(용인대 교수), 김대룡(인하대 교수), 천길영(경기대 교수) 등을 선임한다. 그리고 경기단체 법인화를 1997년중 법인화지원금 5억원을 포함, 모두 20억여원의 자본금으로 법인 등기를 시도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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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도원의 수련생들(출처: cafe.daum.net/Koreajudodojo)


법인은 두개, 임원은 일원화로 통합모드 만들어

이 과정에서 1997년 1월 유도원은 제10대 이사장에 강태수(대주토건 대표이사)를 선출하면서 통합분위기는 가시화된다. 강이사장은 15명의 이사중 상당수가 유도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인사들을 선임한다. 이러한 이사진의 선임을 계기로 70여년의 갈등이 있었던 양단체를 통합분위기로 만들어 간다. 이러한 배경에는 강이사장이 경기인출신이면서 당시 용인대 총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용인대총장으로 있던 김회장과는 협상관계가 휠씬 좋았던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 김회장은 당시언론을 통해 "유도원과의 통합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자신했고, "통합이 성사되면 유도회는 대한체육회 가맹경기단체중 몇 안되는 자생력있는 단체로 변신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도회는 문화체육부에 사단법인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양 단체는 완전통합이 아닌 유도회가 먼저 법인화를 한다. 그 이유는 성격이 다른 두 법인 통합하려면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이 먼저 해체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 것이 원인이 됐다. 재단법인 유도원을 먼저 해체해야 하는데 해체를 하게 되면 유도원의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등 사실상 복잡한 법적 절차가 있었다. 결국은 당분간 종전대로 운영하되 10여명의 이사를 교차 파견하여 사실상 통합효과를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결국 법인은 분리되어 있지만 유도원과의 유도회는 법인이사의 일원화를 만든 것이다.


유도중앙도장 가치 모색할때

통합적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지금 유도원과 유도회는 별개 법인이다. 또, 유도원은 현재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70여년의 논쟁거리였던 유도원이었는데 그 해법은 풀리지 않은 채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렸다. 과거 대한유도회, 대한유도학교, 한국유도원이 소공동에서 공유했던 유도원이었다. 유도원과 재산권 싸움에서 분리된 대한유도회는 현재 국제적인 위치에 놓여 있고, 거리로 쫓겨났던 대한유도학교는 지금 무도 명문 종합대인 용인대학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유도원은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유도원은 한국유도의 중앙도장이다. 전 유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도장이며, 한국유도발전에 중요한 교육과 연수를 담당해야 할 기능이어야 한다. 일본 강도관이 일본과 전세계 유도인들의 중앙도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듯이 한국유도원도 그에 못지 않은 역할을 지닌 중앙도장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해방과 더불어 유도원이 대한연무관으로서 유도뿐만 아니라 태권도도 수련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도원은 한국무도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도장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유도원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서는 유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어 안타까울뿐이다.

한국유도원, 대한유도회, 용인대학교가 다시 과거의 위상을 찾기 위해 고민할때다. 그 방법에는 유도인들이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유도강국으로서 상징이자 랜드마크로서 한국유도원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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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2010.04.22 13:48

박용성회장, 합리적 방안 모색제시

1991년 특위가 해산되고 유도회와 유도원의 경영권 논쟁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도회의 박용성 회장은 1992 대의원 총회에서 전격적인 제안을 한다. 당시 <한국유도 발전을 위한 제안>은 대의원회의에 참석한 각 시도대의원들과 ‘유맥회’라는 올림픽과 세계대회 메달리스트들의 모임인 소장 유도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조처로 평가받았다.

이 제안은 1991년 대의원총회의 위임을 받아 유도회와 유도원의 통합을 추진해 온 9인 특위 활동의 무산과 해산을 계기로 기존방식으로는 통합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다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한 박회장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박회장은 시가 200억원에 이르는 유도원의 자산을 두고 유도인들의 이해관계에 개입을 꺼려 유도계의 현안에 무관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박회장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당시 주무부서인 체육청소년부와 대한체육회, 그리고 법조계의 자문을 얻어 전격적인 제안에 나선 것이다.

이 제안은 박회장과 박회장 측근 인사들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것으로 후에 알려졌다. 이것은 유도회와 유도원이 각기 해산을 통해 새로운 법인체의 설립에 동의할 경우를 전제한 조건부 제안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1.각자 해산 2.양단체 자산의 국고귀속 3.귀속재산의 환수를 위한 대정부 접촉 4. 한국유도협회(사단법인)창설로 요약된다. 이러한 제안내용중 양단체의 해산 및 청산절차는 민법에 따라 시행되며 유도원 자산의 국가귀속은 유도원의 정관 제13조 1항에 근거한 것이다. 이 안에 따라 유도원도 해산에 동의할 경우 실무추진단계에서 체육청소년부와 재무부 등 유관부서의 의사를 타진한 후 정부 귀속재산을 가칭 사단법인 한국유도협회가 증여받는 순서로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안은 유도회 대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유도원측에 1992년 2월말까지 가부 여부결정을 의뢰했다. 또,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체육청소년부의 중재역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원측은 건물 신축 추진위원회를 예정대로 개최하고 고단자 회의를 소집하는 등 변화가 없었다. 결국 유도원측은 2월말에 양단체의 통합안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유도회에 공식 통보한다. 당시 유도원측은 공문을 통해 유도회의 제안에 대해 연구, 검토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법인의 설립목적 및 사업의 이질성을 감안할 때 동의할 수 없고, 유도원의 합리적인 경영방안을 모색해 목적사업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특히 유도회에 대해서도 유도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함으로써 통합에 대한 사실상 협상을 거부했다.


갈등의 반복, 소장파 유도인들 등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LG CYON | KH-1800M | Normal program | 2009:05:05 15:54:44

스포츠센터로 탈바꿈한 유도회관
이러한 통보를 받은 유도회측은 1992년 3월 양단체의 통합안을 대비해 총사퇴했던 집행부를 다시 새로 구성한다. 새 집행부는 종전임원들을 그대로 재기용하였으나 유도원이사장이 겸직했던 채중겸 부회장(국내담당)의 공석을 김정행 전무이사가 대행하고 김동규 유도원이사가 맡았던 여성이사에 영화배우출신 윤양하를 선임한다. 조직개편이 이루어진 유도회는 양단체의 통합문제에 대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이후에 재론하기로 하고 올림픽메달전략수립에 전념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유도원측이 스포츠종합센터 건립 등의 무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에 대해 유도회에서는 사전 저지차원의 법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의견도 팽배했다. 하지만 유도원측도 당시에는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올림픽이후의 논의에 대해 다시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올림픽이후 1992년 9월 유도원의 신축문제를 놓고 유도회와 유도원은 신경전이 이루어진다. 유도원측이 유도회와의 단체통합을 무시하고 대지 6백평의 유도회관 자리에 지상 8층 지하 6층(연건평 5천2백22평)규모의 '여의도 종합스포츠센터'를 착공을 시도한다고 유도회측은 저지를 위한 3개항의 결의문을 유도원측에 전달한다.

이 결의문은 △구체적인 자금조달계획을 수립하고 △각 시, 도지부가 추천하는 양식있는 유도인을 건축추진위원에 포함시켜야 하며 △사업계획을 공개리에 추진할 것 등이다. 30만 유도인의 자산이자 유도계의 해묵은 숙제인 유도회관 문제가 유도원측의 신축강행으로 양단체간 실력대결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유맥회(柔脈會)'(회장 장은경) 등 소장파 유도인들은 각 시도지부를 망라한 '유도회관신축저지 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전국 유도인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계획을 세우는 등 실력저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도원측은 원로 유도인들을 건축추진위에 포함시키고 법인의 성격이 다른 유도회에 알리지 않고 있을 뿐, 감독기관인 서울시 교육위에 추진계획을 보고 하고 있어 사업을 공개하고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당시 유도원측이 밝힌 자금조달계획은 공사 진척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눠 회원권 1구좌당 1천만원씩 모두 1천5백명의 회원을 모집, 1백50억원을 조성하고 나머지는 사무실 임대비용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유도회측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유도원측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서로간의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또한 주무부서인 체육청소년부역시 조정뿐만 아니라 직접 개입을 꺼렸다.


법인설립과 유도원 신축공사의 대립

한편,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정부는 체육단체의 법인화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정부는 자체기금 10억 이상을 확보하고 재정자립도가 50%를 웃도는 단체를 법인화한다는 계획을 세웠왔다. 그러나 이에 해당되는 체육회 가맹단체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만, 유도회는 여의도 유도회관의 자산가치 때문에 1차법인화 대상이었으나 통합결렬로 기금비축이나 재정자립도를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9월에 유도원 신축공사 입찰이 시작된다. 럭키, 우성, 대림 3개사가 참가한 가운데 신축공사 입찰을 시작했으나 대금지불조건 등으로 유찰된다. 그 뒤 또 유찰되고 제3차에서 응찰회사 5개사 중 신우건설이 1백39억 6천만원에 낙찰된다. 당시 도급순위 220위의 중견업체인 신우건설과 1주일 이내에 계약을 체결키로 함으로써 신축공사를 강행했다. 두 차례의 유찰에 마음을 놓고 있던 유도회측은 이날 낙찰 소식이 전해지자 놀라게 된다.

공사대금을 스포츠센터 회원권 판매(1구좌당 1천만원)와 사무실 임대비로 충당하겠다는 유도원측의 계획이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으로 공사비 결제에 차질을 빚을 경우 전체 유도인의 자산인 유도회관 부지를 모두 날릴 수도 있다고 지적해 왔었다.

유도원은 유도회의 양단체 통합제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해 온 신축공사는 전 유도인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유도원 이사진과 일부 원로 유도인들 만으로 추진돼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도계는 유도회에 대한 재정지원과 유망주들의 장학금 지급, 유도인의 후생복지 등을 내세운 공사목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유도원은 1992년 12월 3일 ‘여의도종합스포츠센터' 기공식을 갖는다. 유도원측의 본격적인 실력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유도원측은 1993년 유임의사를 밝힌 박용성회장을 자진사퇴시키기 위해 유도원을 중심으로 한 원로급 유도인과 서울, 경북, 경남을 주축으로 하는 대의원들이 힘을 모은 새회장 추대설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총회막판까지 회장후보를 추천하지 못하고 박회장은 다시 만장일치로 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이 총회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유도회와 유도원의 대립이자 야심 있는 소장파와 욕심 많은 원로들의 대결양상을 띠는 유도계의 치부라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원과 유도회는 별개의 단체로 1994년과 1995년을 보낸다. (계속)

원문보기 http://www.mookas.com/media_view.asp?news_no=11420&pidx=&ucc_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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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3.21 22:09

새마을비리 전경환배경과 A씨의 유도원 관선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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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새마을’비리가 연일 터지자 유도계는 긴장을 하게 된다. 5공 당시 새마을 비리의 주인공으로 부각된 전경환은 한국유도의 막후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유도회는 물론 유도원, 유도학교 등 유도계의 주요 현안에 관여해 왔다. 서울올림픽을 5개월여 앞두고 새마을비리가 불거지자 전 씨 체제 때 소외당했던 원로급 유도인사들은 유도회 집행부를 비롯한 유도원에도 불신을 갖기 시작했다.

전경환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1980년 9월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임되면서 체육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체육계 일부에서는 전경환을 체육회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으며, 한국체육행정을 좌지우지할만한 막강한 인물로 부상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이런 전씨는 유도계에 직접 영향력을 미치기 보다는 당시 한국유도원 A 이사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A씨는 유도학교 교장을 비롯해 관선체제에 있던 유도원에 5공 중기가 넘어선 1985년 2월 이사장까지 맡게 된다. 그는 당시 싯가 60억원이 넘었던 유도원을 내부분규를 틈타 관선 이사장직에 오르며 유도원을 접수한 것이다.

이후에도 각종 소송 등을 승소하며 그의 영향력은 지속됐다. 당시 A원장의 라인들은 유도회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A원장은 유도회 실무 부회장으로 상당히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1986년 1월 박용성 당시 OB사장을 회장으로 영입할 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본부나 유도계를 통해 체육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비리가 불거졌다. 당시 이 비리들은 전씨 보다는 주변 인물들이 그를 내세운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은 전씨를 마치 핵심인물로 떠받치며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신, 기금조성, 호화판 체육행사 등을 통해 얻어지는 단맛을 즐겼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전씨가 내세운 사회체육정책은 당시에 체육행정에서 소외된 부분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체육기금조성을 위한 성금강요나 막대한 국고낭비 등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유도회, 유도원통합 역제안 나서지만 실패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8월 유도원의 이사장에 송학준씨가 선임된다. 이 집행부를 계기로 유도원이 5년간 관선체제에서 민선이사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정상적인 이사체제의 운영에 돌입하는듯 했다. 신임집행부는 유도원의 그림을 바꾸는 전략을 쓴다. 바로 재벌그룹에 의지해 오던 유도회의 재정을 자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도원이 건물임대료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유도원 2층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20층에서 25층 사이의 건물을 짓는 것과 이 건물을 팔고 서울근교에 고층건물을 신축해 임대료를 유도회 운영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두가지 안을 제시한다. 결국은 부동산임대업을 통해 유도회의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도원의 계획에 대해 유도회는 서서히 힘겨루기를 시도한다. 바로 유도원이 관선체제를 탈피하기는 했으나 5공 관선 이사가 포진된 것에 대해 고단자(6단이상)들의 불만이 크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유도원측은 이미 싯가 2백억원이 되어 버린 중앙도장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태세로 맞섰다.

이런 분위기가 오고 가고 유도회측은 유도원과의 통합 법인을 통해 유도원 건물을 고층빌딩으로 신축, 임대료 등으로 재정자립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에는 정부에서 대한체육회 산하단체들의 법인화를 시책에 힘을 얻으면서 유도회가 법인화될 수 있다는 근거로 설득력을 발휘한다.

1991년 1월 29일 유도회는 올림픽회관에서 정기대의원총회를 열고 유도원 흡수통합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참석 대의원 22명은 임의단체인 대한유도회와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이 국내에서 별개의 단체로 알려져 있다는 점과 경기단체의 법인화시책을 내세운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며 유도원을 압박한다. 이를 통해 유도회, 유도원, 중앙대의원 각 2명씩 6명과 유도고단자회 3명으로 구성된 9명을 특별위원회로 구성해 유도회와 유도원을 통합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한다.

1991년 2월 5일 유도회는 올림픽파크텔에서 9인 특별위원회를 열고 유도원 9명의 이사에 대해 자진사퇴를 권고키로 결의한다. 한국유도원에는 한명의 이사를 제외한 8명의 위원이 참석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이 특위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한다.

1991년 7월 13일 특위는 유도회 이사로 4명의 유도원 이사를 영입하고 유도원도 유도회가 추천하는 4명의 유도인을 유도원 이사로 서로 교환하도록 결의하지만 통합의 실마리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유도회의 박용성 회장과 집행부가 사퇴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유도회와 유도원의 통합을 설득하지만 이 특위는 9개월만에 해체된다.

1991년 10월 22일 제5차 회의에서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이견만이 난무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회합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9명의 위원중 5명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유도원 이사장겸 유도회 부회장과 유도회 전무이사는 "양단체의 이사 4명을 교환 영입한다"는 특위 4차회의의 합의사항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에 대해 쌍방의 책임만을 물을뿐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사실상 특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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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s2010.03.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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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18일 오후 2시. 여의도에 한국유도의 메카인 한국유도중앙도장 기공식이 거행됐다. 대지 2200여평, 지하1층과 지상2층으로 건편 668평. 당시 총공사비 7800여만원으로 1972년 11월 준공을 목표로 기공식을 가진 것이다. 이 당시 설립주체는 재단법인 한국유도원으로 당시는 대한유도회 지원단체였다. 기공식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장경순 당시 대한유도회장, 양탁식 서울시장, 신도환, 신동관의원, 그리고 유도인 200여명이 참가했다.

서울 소공동에 있던 중앙도장을 매각한 후 4년만이다. 그러나 이 기공식에도 불구하고, 예산부족으로 60%의 시설공사중 1년 반만에 공사가 중단됐다. 당시에 예산부족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유도계의 파벌싸움으로 중단되었다. 중앙도장이 없던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도경기와 훈련은 YMCA, 연세대, 보성고 체육관 등을 임대해 사용했다.

1975년 12월. 어려운 진통에도 불구하고 한국유도원은 완공을 하고 개관했다. 하지만 대한유도회와 한국유도원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놓고 진통을 겪는다. 남들같으면 서로 맡겠다던 시설을 당시에는 회관건립이 되었으니 무조건 인수하라는 유도원측(대표 장경순)과 1억이 넘는 은행기채와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운영문제 등의 독소조건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인수를 못하겠다는 유도회(회장 신도환)의 서로 다른 입장이 일어났기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소공동의 중앙도장의 매각을 계기로 7년간의 분쟁을 일으킨 유도원과 유도회의 갈등이 지속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대한유도회가 대한체육회의 문제단체로 관리되는 최악의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관리단체를 극복하고 난 뒤에도 유도원과 유도회의 인수갈등은 지속되었다.

유도원과 유도회의 갈등은 1968년 유도원이 소공동소재 중앙도장과 소유권과 관리권을 갖고 매각처분한데서 비롯됐다. 이 중앙도장은  일제시대에 이왕직의 대지를 빌어 일본강도관 조선지부로 설립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소유권은 문화관리국으로 넘어갔고, 일본강도관출신이었던 신도환(1975당시유도회장)이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가 1950년 9.28수복과 더불어 재단법인 대한연무관으로 넘겨준 것이다. 그 후 중앙도장은 연무관이 점유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도계는 유도연맹과 유도협회로 앵립되어 있었고, 5단이상의 고단자들이 모여 일원화에 합의한 후 대한유도회로 통합되었다. 이런 통합이 있었음에도 한국유도원은 1956년 발족하여 유도계를 군립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기전 1953년 6월에 중앙도장을 본거지로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가 설립돼 중앙도장은 대한유도회, 한국유도원, 대한유도학교가 점유하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구조에서도 한국유도원의 이사장에 한진희씨가 추대되어 원활한 정비가 되었으나, 1967년 1월 유도원의 3대회장에 장경순씨가 이사장으로 취임되면서 같은해 11월 이사회에서 재선처리에 대한 일체의 권안을 위임받았다. 당시에는 문화재관리국의 소유인만큼 임대료 미불 등의 행정소송까지 이루어지다. 1968년 대지 372평과 목조 217평의 소공동 소재 중앙도장을 공개입찰끝에 애경유지에 평당 27만5천원에 매각처분됐다.

중앙도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자 함께 점유하고 있던 대한유도학교도 연고권을 주장하고 건물을 비워주지 않자 1969년 4월 명도소송으로 확대돼 대한유도학교측이 패소해 건물없는 학교로 전락하게 됐다. 이 시기 유도계에서는 중앙도장의 매도가격이 시가보다 절반밖에 안된 가격으로 매각되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이것은 유도회 총회때마다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도원측은 중앙도장의 신축대지를 1970년 돈암동의 하천복개공사허가를 서울시에서 얻었으나, 건설부에서 허가가 취소되자 복개허가를 서울시에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3천6백만원을 보조받게 되어 1971년 서울시에서 매립한 여의도의 유도회관대지 2410평을 당시 시가보다 낮은 평당 3만2천여원씩에 매입한다.

결국 유도원은 소공동 중앙도장을 매각한지 4년만인 1972년 11월 14일에 유도회관 건립에 착수핬고, 국고보조 2천만원을 받으면서 자금난을 극복했으나, 이 시기 은행기체 1억여원으로 겨우 완공시킨다.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유도전용도장이라는 시설로 모습을 보였지만, 1964년이후 유도회장직에 있던 장경순씨가 1973년 유도회 정기총회에서 집행부구성문제로 취임을 거부하자 본격적인 파벌싸움이 시작된다. 이 파벌싸움은 결국 유도원과 유도회의 이원조직을 부채질하게 된다.

새 유도도장을 건립하고 유도회장을 당연직 유도원 이사로 정관을 개정한 유도원측 세력들은 유도회에 정식으로 회관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인수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유도회는 은행기채액 1억원에 대한 금리만하더라도 매월 130여만원을 넘고 있으며, 건물유지비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유도회관의 인수를 거절한다.

하지만 당시 유도원측은 당시의 2천여평의 대지가 공지로 있는 만큼 땅값이 평당 10만원대까지 이르게 되면 이중 1천여평을 매각해 은행기채를 해결하고, 나머지 공지를 테니스장으로 만들어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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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