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력'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11.23 차력이란?
  2. 2010.06.14 북한무술, '격술'은 종합격투기
  3. 2010.02.01 최배달도 인정한 장씨의 차력
  4. 2010.01.01 차력(借力)의 세계
Report/Martial Arts2010.11.23 17:09
 이 글은 문영민과 강수미가 2006년도에 발간한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차력을 기공무술이라고도 하고 나름대로 무술의 강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새로운 각도에 차력을 설명하고 있어 소개한다.

 

차력의 뜻을 직역하자면, “빌린 힘”정도가 될 것이다. 한국에는 도교를 비롯해 철학과 고행을 통해서 우주의 섭리를 체득하려는 시도의 ‘전통’이 있다. 흔히들 속세를 벗어나 “입산”한다고 한다.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우주의 이치를 몸소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중후반에는 이렇게 산에서 도를 닦다 진리를 얻어서 하산해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터득한 진리를 일깨우겠다는 이들이 많았고, 차력은 그들의 포교법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차력사들이 빌린 힘은 대자연, 우주, 혹은 진리를 체득한 조상들에게 빌린 힘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차력이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졌던 시기가 군부독재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차력시범의 흔한 예는 차력사가 트럭 따위를 밧줄로 연결하여 입에 물고 끄는 것이다. 폭압적이며 남근주의로 상징되던 독재하에서 차력은 정신적인 계발보다는 비정상적으로 육체의 힘을 중시했다. 차력시범은 근거를 알 수 는 없지만 정력보강의 비결로 훌륭하다는 약을 파는 약상수들을 항상 동원했다. 어쩌면 약장수들이 차력사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차력시범에서 참여자들, 즉 시범자, 약장수와 관객들은 노동자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고, 구경꾼들의 순진함은 성공적인 차력공연의 필수조건이었다. 결국 차력은 동양의 정신적 수련의 전통이 기괴하게 변이된 형태이다.


차력은 효율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던 독재시절의 유산이다. 1970-1980년대에 차력은 또한 극장과 디스코텍에서도 시범의 차원이 아닌 구경거리로 공연되기도 했다. 그것은 극장에서는 영화 그 자체만이 관람객을 모으는데 부족하다고 추기전에 짜릿한 육체적 힘의 극치적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고객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려 함이었을 수 도 있겠다. 아무튼 차력이 정신적 수련에서 시작되어 남근주의의 상징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렵다.

문영민, 강수미.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 현실문화연구, 2006. p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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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6.14 16:16

MOOKAS 미디어 2005년 9월 2일자 ‘북한격술연구소 연구원은 격술달인’이라는 보도가 나간 적이 있다. 최근 북한 군무술로 알려진 ‘격술’에 대해 무술계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연 격술은 어떤 무술인가. 귀순 장교출신인 김정교씨가 쓴 <북한군에은 건빵이 없다>(플래닛미디어)와 북한장교출신인 호혜일씨가 쓴 <북한요지경>(맑은 소리)에는 격술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다. 지금부터 이들이 저술한 내용과 그동안 북한귀순자들이 진술한 보도자료를 중심으로 격술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격술은?


북한군이 하고 있는 무술은 차력, 유술, 레슬링 등과 더불어 복합적인 응용기술로 정립된 ‘격술’이 있다. 격술이 태권도와 가장 크게 다른점은 훈련동작의 유연성이나 정확성보다는 실전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실질적인 살인기법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격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많다. 일본의 가라테의 권성이라는 조총련 교포 나카무라 히데오의 ‘권도회’를 중심으로 구소련의 코만도삼보와 태권도(ITF)의 결합으로 군사격투의 실전전투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또다른 의견은 송도관가라테, 복싱, 레슬링을 조합해 만든 북한군 무술로 1960년대말 김일성이 군부대를 현지 지도하던 중 “일당백” 정신을 내놓으면서 두각을 나타낸 무술이라는 주장도 있다. 필자는 북한에 태권도가 보급된 것이 1980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격술의 근거는 후자의 것이 먼저고, 그 뒤에 전자의 주장대로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격술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정권 말 국방부에서 전시에 대한 맨손격투실험에서 한국특전사(태권도 수련)들이 월남에서 귀훈한 북한군(격술)과 대결에서 일격에 모두 참패와 실신했다는 이야기에서 전해진다. 또, 귀순한 북한군출신들의 증언 중 북한에는 4군단 북한 특수부대 경보병여단 요원들이 개성시내에서 1979년엔가 1976년 올림픽 복싱메달리스트와 싸움이 붙어서 죽였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당시 경보요원 3명과 복싱선수 2명이 붙었는데 강철같이 단련된 주먹 앞에 복싱 메달리스트 출신 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1968년 자수한 북한군 124군부대 소속의 조응택은 하루에 3천번의 격파훈련으로 격술을 수련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적도 있다. 또, 김신조 역시 격술과 유술을 훈련받았다고 했다. 1977년 귀순한 이영선은 하루에 2천번이상 시멘트바닥이나 돌을 치는 수도(手刀)훈련과 대련, 10m 떨어진 표적에 단도를 던져 명중시키는 단도전법훈련 등의 격술을 말한적도 있다. 뿐만아니라,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인 김현희도 격술훈련을 받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급되는가?

북한의 보병부대는 격술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특수부대의 경우에는 더욱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중점적인 기술은 급소를 가격하고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리는데 있고, 격술의 진수는 한방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정신력과 힘, 그리고 스피드로 알려져 있다.격술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부서는 각 업무별 특성상 나뉘어져 있다. 15호 격술연구소는 인민무력부, 격술연구반은 국가안전보위부, 59호 격술연구소는 인민보안성을 대표하고 있다.

평안남도 남포시 소속 강서지구에 위치한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대학에서는 교육생들이 범죄자와 총기없는 대결에서 승자가 되도록 하는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격술을 교육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내 간첩 및 반정부적인 인물들을 색출해 내는 국가의 정치적 안보를 책임지는 기관이다. 국가안전보위부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겸직하고 있으며, 실제 책임자는 제1부 부장이 총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북한내 격술전문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격술분야에서 강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곳은 인민보안성 정치대학 59호 격술연구소다. 남자 100명, 여자 100명정도의 격술연구생들이 있으며, 격술훈련을 받고 있다. 여기는 북한내에서 인정받는 격술전문기관으로 여자들의 격술실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들은 범죄자들에 대한 감찰과정에 필요한 격술동작을 수련하면서 연구하고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또, 교육과정을 마치면 수사기관의 감찰단위에 배치돼 범죄자들에 대한 직접감찰을 담당한다.

평양시 사동구역 마라무지에 위치한 15호 격술연구소는 조선인민군 4.25 국방체육단 옆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인민무력부의 격술모체인 15호 격술연구소 교관들이나 우수한 연구생들이 있는 곳이다. 이 연구소의 교관들은 그들이 연구개발한 동작들과 격투기법들을 전 북한군에 보급한다. 이것을 그들은 ‘주체격술’이라고 부른다.

평양시 순안구역에 위치한 ‘130연락소’는 대호로도 불리어지고 있는 간첩교육기관이다. 여기에는 공작원반과 전투원반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격술에 대해 오랜 역사를 지닌 격술집단이다. 남한뿐만 아니라 제3국에 파견할 공작원이나 전투원을 양성하고 있고, 기본교육 중 하나가 격술이다. 공작원들은 주로 정보수집요령과 분석, 종합, 판단능력을 위주로 한다면 전투원들은 밀로개척, 침투, 테러, 암살, 폭파 등 액션적인 능력이 주가 되기 때문에 격술훈련의 비중은 더욱 크다. 이들의 격술내용은 주로 차력과 기공술이 주를 이룬다. 서로 이마를 마주하고 서서 양끝이 뽀족한 철근을 양미간 사이에 마주대고 순간적으로 철근을 휘게 하는 훈련, 이빨로 로프를 물고 10톤 화물차를 끄는 방법, 배위에 널빤지를 놓고 20통 화물차가 지나가게 하는 등의 훈련이 이루어진다.


대회방식은?

1986부터 1988년 무렵 격술바람이 불어 해마다 ‘조선인민군 자유격투경기대회’가 개최된다. 경보병, 항공육전병, 해상육전병 등이 참가하며, 여단별 선수단을 만들어 진행한다. 주 종목은 자유격투, 전투사격, 조별행군, 조별 적군무기 및 각종 기재 자유자재로 다루기, 변장술, 차력, 유술, 레슬링, 군사 3종경기, 낙하산 강하, 전투수영 등이 있다.

초기대회 수준은 권투수준이었으나, 1987년 제7차 대회부터는 킥복싱 수준으로 발전했고, 1990년도 제19차대회부터는 글러브를 아예 없애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경기는 두 눈찌르기, 다리사이 급소가격을 제외한 어떠한 타격도 허용되며, 3분 3회전으로 진행된다. 또, 매년 9월경에는 평양시 사동구역 송신동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정찰국 예하 훈련소에서 ‘조선인민군 격술대회’가 개최된다. 각 예하부대에서 선발된 우수한 격술선수들이 2,000여명이 출전한다. 여기서 1등부터 10등까지는 조선인민군 15호 격술연구소 연구생으로 받아 들인다. 대회의 심사와 평가는 연구소 교관들이 나와 진행하고, 1대 1 맞서기를 기본으로 진행하며 자유격투라 불린다. 훈련복을 입은채 손에만 얇은 가죽장갑을 끼고 아무런 제한 규정없이 진행한다고 한다. ‘시작’신호와 함께 상대를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 쓰러뜨리면 된다. 대부분의 경기는 2,3분에 종료되며 길어도 5분내에 결정지어지고, 격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고환결핵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실전을 방불케 한다고 전하고 있다.


격술전문가 진출은?

격술연구생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15 격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교육을 마치면 조선인민군 정찰국이나 교도지도국, 각 군단의 저격 및 경보병 여단들에게 격술만을 전담한 훈련참모로 배치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격술을 통해 외화수입이 있는 해외파견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15호 격술 교관들은 아프리카 등지로 훈련교관으로 진출하고 있다. 1977년에는 토고에 군사요원의 해외 파견일환으로 격술교관 50명을 파견한 사실이 당시 북한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각 군관학교의 경우에도 격술이 교고과정에 포함되어 있어 교관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북한태권도로 불리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의 태권도는 1980년에 보급되었다. 태권도는 북한군에서는 군보급 격투기법이 아니다. 태권도는 학생, 체육인, 직장인의 체력단련용도로 보급되고 있으며, 태권도사범과 격술을 연마한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귀순장병들은 올림픽에 나오는 태권도대련은 나른하고 재미가 없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첩파견 양성기지인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의 격술교관들은 최근 ‘국제태권도연맹사범’으로 이적해 해외 태권도사범들로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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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Good Writing2010.02.01 16:54

최배달로 알려진 최영의의 저서에 차력고수가 등장한다. 무카스미디어 전문위원인 허인욱선생이 기고한 글에는 차력의 또다른 세계를 말해 주고 있다. 일본원전으로 발간된 '백만인의 가라테'에 나오는 장씨의 이야기는 당시 일본을 자극할만하다.

최영의(1923~1994)의 '백만인의 가라테'에는 차력의 고수인 ‘장’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은 성으로 보이는데, 이름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최영의는 차력은 글자 그대로 힘을 빌리는 것으로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자기의 힘에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힘을 얻는 것을 말하며, 한국에서 초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비술을 종합한 것이라고 했다.

차력가 장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국의 어떤 시골,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분지의 마을에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신문화의 물결이 이 산 깊은 분지로 밀어닥쳐서 사람들 사이에 머리를 단발하는 일이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이 마을은 지금도 옛날처럼 상투를 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매년 이 분지 마을은 농작물이 풍부하게 영글었고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이 타작을 위해 모두 나서는 바쁜 시기가 된다. 그럴 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슬며시 한 중년의 상투를 튼 사나이가 나타나는데 장 씨라는 남자였다. 막벌이로 나섰다고 보면 된다. 장 씨는 일꾼들 틈에 섞여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는 말도 없이 어느 새 마을에서 사라졌다. 마을 사람은 그가 제때에 나타나지 않으면 “올해는 녀석이 오지 않는 것인가!” 라는 이야기를 했다.


조선권법 그림
배운 것도 없고 욕심도 없고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특별한 문구의 말도 없이 묵묵히 일하고는 때때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본인이 말이 없이 묵묵히 있어도 서로 상대하는 중에는 무엇이건 알게 되는 것이어서 그가 차력을 수련한 남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차력은 아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며 어른들에게도 신비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온화하고 점잖았다. 마을의 일꾼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끔 장 씨에게 차력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장 씨는 웃으면서 그저 듣기만하고 말을 흘렸다. 차력의 차자 소리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을 들어 수확이 끝나자, 마을에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가 개최됐다. 이해의 풍작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축제엔 인근 사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모여들어서 마을의 마당에서 씨름을 하고 힘을 겨뤘다. 그해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대한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장 씨는 아무리 권해도 이 씨름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만은 몇 번 권해도 응하지 않았다. 보기로는 보통 일꾼과 다름이 없는 골격, 근육이어서 힘 자랑하는 젊은이와 씨름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장 씨의 태도가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마을에선 ‘차력을 수련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짓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의 씨름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서 승리해 장사가 된 남자와 장씨가 사소한 일로 말썽을 일으키게 되었다. 100명이나 되는 상대를 이긴 골격이 억센 거구의 장사가 상품인 소를 마당에 매어놓고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으면서 막걸리로 술잔치를 벌리고 떠들어댔다. 과연 씨름 장사답게 많은 씨름꾼에 둘러싸인 중에서 한결 돋보였고 술기운을 잔뜩 띤 수염이 가득한 얼굴은 장사다웠다. 한참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 여러 사이에 섞여서 조용히 앉아 있는 장씨를 본 장사는 취기에 털 많은 팔뚝을 걷어올렸다. 장사는 “이봐, 장 씨, 차력가는 술을 통째로 단숨에 마신다고 하는데 여기 나와서 한번 마셔봐. 자 여기로 오라니까”라며 명령조로 말을 했다. 그런데 장 씨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때가 막 잔치가 끝나려고 할 때였는데, 장 씨가 바로 그때, ‘아 아’ 하며 크게 하품을 하였다. 이것을 본 장사는 “이놈 봐라” 하면서 노려보았다.

장 씨는 황망히 손을 입에서 떼고 목을 움츠리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장사는 성큼 일어섰다. “이놈 버릇없는 놈. 앞으로 나와”하면서 무섭게 소리쳤다. 이제까지 떠들썩했던 술자리는 일순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았다. 장은 붙잡히면 큰일이라고 사람들 뒤로 다람쥐처럼 숨어서 곤란함을 피하려고 했다.



백만인의 가라테에 실려있는 차력사 장의 이야기

“더는 참을 수 없다. 한마디 사과도 않고 도망치는 터무니없는 놈이다.”라고 하고는 씨름 장사는 달려나가서 장 씨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술자리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그러면서 우람한 주먹으로 장의 콧등을 마음껏 치면서 동시에 박치기를 먹였다. 쿵하는 예리한 소리가 나면서 장 씨는 숨을 죽인 사람들 앞에서 뒤로 크게 쓰러졌다. 그런데 곧 “푸푸푸…”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함께 의식을 잃고 기절했으리라고 생각한 장 씨가 성큼 일어나더니, 흐르는 코피를 닦았다. 그 장 씨의 한쪽 손엔 비틀어 잘린 상투가 피가 흥건히 묻은 채 손에 들려 있었다. 어느 사이에 비틀어 잘렸는지 누구의 눈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일어난 것이었다.

이 때 ‘헉’하는 소리가 났다.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장사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지른 것이다. 금시 몸이 큰 남자의 얼굴은 머리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노인들의 지시로 술을 머리에 붓고 세척한 다음 지혈을 위해 된장을 바르고 응급조치를 취하는 한편, 의원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 군중 사이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것은 소문대로 차력술의 위력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게 된 데 대한 놀라움의 탄성과 찬탄의 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 장 씨는 찬탄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자신아니라느 듯이 여러 사람과 함께 쓰러진 사나이의 머리를 치료하는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인연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거구의 장사와 그 후 이 둘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아져, 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 어느 때 이 지방 일대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는데, 격렬하게 내린 비 때문에 홍수가 나서, 탁류가 마을을 삼켰다. 어느 마을 산의 급경사면의 가운데에, 어른 넷이 껴안아도 안을 수 없을 정도의 바위가 묻혀 있었는데 탁류로 바위 주위의 흙이 씻겨나가자 비탈을 미끄러져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여기를 돌보려고 온 장 씨가 이것을 보자 진흙탕 경사면을 마치 나르듯이 달려가서 바위를 따라가 손으로 받아 막았다. 바위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이 바위아래에 있는 농가와 그 안의 사람을 다치게 될 것으로 절망했지만, 장 씨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집도 부서지지 않았고 사람도 구했다. 장씨는 이 때 바위를 손으로 막는 바람에 몸의 절반이 진흙 속에 빠져들었다. 뒤에 장 씨가 받았던 바위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데 10인 이상의 도움이 필요했다. 후에 이 바위를 옮길 때 장정 네다섯이 달려들어서 겨우 움직였다고 한다. 어째든 그가 바위를 쫓아갔을 때의 모습은 그 빠르기가 천마와 같았으며 바위를 막아섰을 때의 그 힘은 범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과장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소감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마을이 타작으로 바빠지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장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으며 타작이 끝나자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 때 차력에 대해서 끈덕지게 질문하는 마을 사람에게 장 씨는 한마디만 나직하게 말했다. “힘이란 쓸수록 강해지는 것입니다. 수련만 제대로 한다면 반드시 신의 힘이 체내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도중에 차력을 그만둔 의지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최영의는 장 아무개 이야기를 50년 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이 1969년(소화 44)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차력가 장 씨는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경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을 준다.

최영의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집이 부유해서 일하는 사람을 20여 명 정도 두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일꾼 중의 한 사람이 덕수였는데, 그로부터 어떤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배운 무술이 어떤 종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중국 ‘남권’이라고도 하고 ‘택견’이라고도 하며, ‘차비’ 혹은 ‘잽이’라고도 한다. '백만인의 가라테'의 저자 소개를 보면, 그는 9세 경에 권법을 배워 중학 2년에 초단이 되었다고 하고 있어 권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무예를 소개하는 내용에는 조선의 무예를 서술하면서 그 특징으로 박치기와 머리카락(댕기머리?) 치기, 어깨치기 등의 특이한 기법이 있었다고 하며 발을 사용하는 소년과 선비의 대결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조선권법’이라고 기재하고 있어, 권법이 특정 무예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이 때 무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덕수로부터 들었거나, 당시 동네에 널리 알려져 있던 차력사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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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2010.01.01 13:03

차력은 '영적 집중'으로 내공수련의 하나

인간읜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한때 무예의 세계에서 단골시범으로 등장하는 차력(借力)은 사회적 비판으로 수십년간 외면되어 왔다. 나이트클럽이나 행사장에서 눈요기 거리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체계화한다거나 정립하는 과정도 없었다. 이에 필자는 차력의 세계와 관련련한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살펴보았다.


내공의 표출방식 차력술(사진은 격파장면)
차력은 사전적 용어로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spiritual concentration'이라고 해 '영적 집중'으로도 표현한다. 이러한 차력의 본 의미가 있음에도,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마술쇼와 같은 것 아니냐는 편견으로 바라본다.

차력의 사회적 인식은 1970년대 '차력술'이라고 해 외적인 능력표현으로 흥행된데서 출발한다. 그 이전에도 차력의 수련법은 있었지만, 1970년대 차력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예인들이 하나둘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이 시기 무예계는 해방이후 대한체육회에 유도, 검도, 태권도가 가맹되면서 나머지 무예들은 외면당하던 때이다. 이런 와중에 제도권이외의 무예들이 전통무예의 비기(秘技)와 '안보무술'이라는 이름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차력술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예의 신비감을 보여주는 계기를 불러왔다.

1970년대 초, 현재 대한유술협회 장만철회장이 29세때 당시 대한차력운영회 소속으로 공중비행검술로 인기를 모았고, 어린이날 단골시범을 보인 무궁화차력단의 박성권, 그리고 과학기술처에 근무하고 있던 최동섭이 1974년에 종로구에 차력무술도장을 개관하기도 했다. 1975년 당시 감사원 동홍욱 총장도 맨손으로 못을 박는 차력의 보유자였다. 이런 차력의 흥행으로 차력영화 시리즈가 기획되는 등 차력의 세계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인기였다.


80년대 약장수, 불법시술 등 부정적 인식 강해 외면


1982년 불법시술관련 기사(경향신문)
차력의 흥행은 1970년대 종합무술대회가 개최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붉게 탄 쇳덩이를 맨손으로 마음대로 주무르는 화공술, 차돌을 맨손으로 도끼질하듯 다듬는 파격술 등은 당시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력(?)으로 당시 관람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MBC의 <묘기대행진>에서 매번 등장하는 차력사들의 차력술은 시청자들에게 최고의 볼거리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7년에는 내, 외공술과 기공술을 통합해 '충무무술'이 창시되기도 했다. 하나의 체계적인 무술로 발전해 보겠다는 의지였다. 단칼에 밀감 조각내기, 인체를 무기로 삼는 내공, 검과 봉을 사용하는 외공, 천지수인력(天地水人力)을 합하여 큰 힘을 내는 기공의 기법을 통일한 것이다. 이러한 충무무술은 1975년부터 차력과 타격술이 통합 발족되면서 기공술을 연마한 최대길(당시 40세)과 내외공술의 홍광주(당시 35세)가 그 주인공이다. 최대길은 20세전후로 5년간 계룡산에서 수도했고 차력술을 배워 자동차 넘기기, 트럭 버스를 맨손으로 끌기 등의 특기를 지니며 남한산성에서 제자를 육성해 왔다. 또, 홍광주는 주먹으로 벽돌 7장깨기 등 타격술에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력의 세계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약장수들이 차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약을 판다는 사회적인 비판이 뒤따랐다. 결국 수많은 약장수들이 입건됐고 차력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특히 1981년 MBC뉴스센터에서는 '신비로운 차력의 세계'라는 주제로 심층취재보도되면서 차력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2주일간의 집중취재를 통해 차력수련에 정진하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약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사기성이 농후한 차력사들에 대한 비판이 첫 보도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이 뒤따르자 일부 무술인들이 도장을 차리면서 또한번 차력은 사회적 외면을 받게 됐다. 1980년대 초반 불법의료시술행위로 전국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 차력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딸 낳는 법, 임신조절이라든가, 요통·디스크치료 시술 등으로 도장이 아닌 불법 시술소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신은 순수한 차력사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차력은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력의 체계화, 연구필요

사회적으로 사기성 흥행이라는 비판 때문에, 차력무술인들은 새로운 무예이름으로 변신을 하였다. 90년대 부터 '기공'과 관련된 이름으로 변했다. 대표적으로 현재 대한유술협회 장만철 회장이 이끌었던 기공무술협회와 한국건신기공협회 오동석회장이 이끈 차력무술협회가 있다. 외공으로 볼 수 있었던 차력술이 본래 차력의 수련체계인 내공위주의 수련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렇게 잠들어 있던 차력술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지난 11월 29일 김포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제3회 전국무전에서 장만철회장은 대한유술협회 경기종목에 차력술로 차력을 평가하는 경기방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기방식은 내공의 기능을 외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른 무예와 차별화한 경기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 경기에 대한 평가는 분분했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입장에서는 70년대와 80년대 약장수나 불법 시술자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인식을 극복하고 차력의 세계를 다시 보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아직도 ‘보여 주기식 시범같다’는 자칫 속임수로 보일 수 있다는 평가였다. 'show'에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무예의 스포츠화는 각 무예들이 지닌 어쩔수 없는 사회적인 선택이었다. 최근 무예는 본질적인 구조인 내공과 외공의 수련체계와 스포츠에 대한 경계가 점점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예와 스포츠는 차별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를 기존 스포츠화된 무술들은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기방식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다.

사라져 가는 차력과 차력술은 분명히 우리 현대 무예사에서 큰 영역을 차지했다.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일부 차력 원로들과 젊은 차력인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아울러 학계에서도 차력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무카스 Tip] 차력과 차력술

본고에서 차력(借力)은 내공의 능력으로, 차력술(借力術)은 내공의 기능을 외공으로 표출하는 방식으로 구분했다. 또 한번 강조하면 사전적의미로 차력이라 함은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것이고, 차력술은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기술이다.

* 허건식의 무예보고서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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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