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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1 1930년 YMCA는?
Report/Martial Arts2013.02.11 15:36

1930년 YMCA마크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YMCA)는 1903년 가을에 창립되었다. 이 청년회의 체육부는 1904년 봄에 창설되어 조선체육계의 단체로서는 최초다. 야구, 정구, 축구 등 모든 스포츠종목이 이 체육회를 통해 보급되었다. 당시 총무는 질네트로 농구, 스케이트, 배구 등 각종 종목을 시작하였고, 1916년에 실내체육관을 건축하고 검도, 유도, 목마, 철봉, 포환, 체조, 체육무용, 권투, 아령, 인도봉, 체육강습회 등 각종 운동을 장려하였으며, 계절별로는 겨울에 모한연습, 여름에는 캠핑, 등산, 원족회, 수영 등의 행사를 했다.
1930년을 기점으로 조선에 처음 씨름대회와 전조선궁술대회를 동아일보후원으로 개최하여 조선의 전통종목을 장려기하 위한 노력을 하였고, 전조선바스켓볼대회(전조선농구대회)와 발리볼대회(배구대회)를 동아일보 후원사업으로 열리며 연중사업을 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며, 유일했다.
이외에도 황성야구단을 조식하여 일본에 원정한것과 하와이동포야구단을 초청하고 야구단이 방문한것과 농구의 일본원등 1930년까지 4회를 실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0년 주요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정구의 금강구락부 창설자 이세정

금강구락부 이세정

이세정은 개국 504년 출생. 1914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에서 활동하다, 경성매동 수송동 공립보통학교로 전직하다가 경기상업에 한동안 취직하고 그후 진명여자고보로 옮겼으며, 조선정구계에 조직된 단체로 최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금강구락부를 1922년 창립한 인물이다. 창립시기는 매동공보에 재직중 시절이다. 조선최초의 정구단체인 금강구락부를 모체로  훗날 조선정구협회의 창립당시 창설자인 목포의 구종태 등으로 태양구락부, 백웅구락부 등이 생겨났다.

1895(고종 32)∼1972. 호는 일해(一海). 서울 출신. 1911년에 매동(梅洞)고등보통학교, 1914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를 졸업하였다. 191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20년에 매동고등보통학교 교원과 경기도교원양성소 강사, 1923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 교사를 거쳐 1925년부터 36년간 진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뒤 정년퇴임하였다.  그 뒤 1972년까지 일성학원 설립자로서 일성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 근무했으며, 은석학원ㆍ숙명학원ㆍ인창학원ㆍ경기학원ㆍ화산학원ㆍ인하학원ㆍ향림학원ㆍ송산학원ㆍ문성학원ㆍ명성학원ㆍ강문학원ㆍ대동학원ㆍ동도학원 등의 학교법인 운영에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시교육회ㆍ대한교육연합회ㆍ교원공제조합ㆍ문교재단연합회ㆍ중앙교육위원회ㆍ중앙교육연구소ㆍ국정교과서주식회사ㆍ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연합회ㆍ사학진흥위원회ㆍ서울대학교기성회ㆍ세계교육자대회 등 각종 교육단체에 설립자 또는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한글학회 임원ㆍ국어심의위원ㆍ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체육활동으로는 정구인의 단체인 금강구락부 창설을 비롯하여 1925년에 조선정구협회를 조직하였고, 1945년에는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하여 조선체육회(지금의 대한체육회)를 재건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대한연식정구협회장을 역임하면서 연식정구 발전에 이바지하였다.1960년 10월 아시아연식정구대회에 단장으로 참가하였고, 문교부체육심의위원ㆍ올림픽대책위원ㆍ서울신문사체육상 심사위원장ㆍ체육장학위원회 부위원장ㆍ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학교체육 및 사회체육 발전에 힘썼다. 1957년에 교육공로표창상(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69년에 대한민국체육공로상, 1971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유도의 강낙원

무도생활 20년 백절불구한 강낙원

시내 원동에 있던 조선무도관장 강낙원씨는 개국 503년 출생하여 19세때 경성고등공학교의 전신인 관립 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에 유학하였다가 1906년에 협성실업교자리인 우성학교지하실에 조선에 처음으로 경성체육연습소에서 유도를 배웠으며, 1911년 유금도를 교수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에 안국동 공영여관자리로 옮겨가 있다가 4년후 다시 오성학교 지하실로 돌아와 이리저리 간판을 등에 걸고 유금도지도에 노력을 다였다. 1919년에는 종로청년회 유도부 선생으로 힘쓰다가 1920년에 경성체육연습소를 무도관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맡아오다가 금원동에 도장을 세우고 유지의 원조를 더해 도장 전체를 운영하였다. 1930년까지 양성한 수련생은 유도, 검도, 권투 세개부에 120여명.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사범을 겸임하여 다수를 지도하였다.





축구의 서병의

축구심판 선진역할, 서적 저술, 서병의

서병의는 개국 502년(1893) 인천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해외에 유학을 하였다 1899년 중국 상해 서양인소학교 토마스핸버리를 졸업하고 1903년 영국 앨니브리칼리지를 마치고 1908년에 영국의 스코틀랜드 글라스고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가 옥스포츠대학으로 전학하여 1910년에 동대학 한문과를 졸업하고 1913년에 인천으로 돌아와 조선글과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동안 '가갸거겨'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자습하는 일화도 있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당시 그 나라 운동인 축구기술을 연습하여 귀국즉시 인천에 자신이 배운 기술을 코치하여 체육회를 발족하여 약 3년간 체육계를 위해 노력하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기술이며 규칙, 심판에 대한 소책자를 저술한 일도 있으며,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자 제1회대회부터 축구심판에 가장 권위있는 역할을 하였다.

서병의는 지금은 인천에서도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고 최성연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 몇줄 나와 있다.

"축구를 하어 웃터골에 나올적이면 일반 청년들은 겨우 미투리에 감발을 아였건마는 그들 형제는 가죽 축구화도 부족해서 정강이까지 가죽용구를 감싸고 나오는 통에 모두 기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호화롭게 살던 귀공자들이었고, 또 외국유학을 갔다온 재사들이었으나, 인천에서는 그들을 받아줄 만한 직장이 없었던 탓인지 서병의 씨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해며 천진서 살았다는데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협의를 받고 우리 독립군의 손에 일가 몰살을 당였다고 한다"

최성연선생은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을 나왔다고 언급하는데, 동아일보에서는 올스퍼드로 되어 있다는 점, 친일혐의가 구체적으로 어떤것이었는지 모르는 가운데 끔찍한 죽음 맞이했다는 점은 사실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동아일보에 보면 18세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는 것, 그가 한문학을 했다는 등. 다소 의심스러운 점은 있다.

1926.11. 제7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부를 대표해 감상담
1923.11.  심판
1931. 11. 제12회 전조선축대회 심판
1922. 05.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대회예선전
1922. 11.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원
1923. 11. 제4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원
1923. 07. 동경유학생축구단-임슬구락부 주심
1923. 06. 체육잡지 조선체육계 잡지편집 전문가
1923. 07. 조선체육회 육상경기연구 위원
1923. 06. 조선체육회 이사회
1924. 11. 제5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
1925. 04.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부장
1926. 11. 제7회  전조선축구대회  심판부장
1927. 10.  전조선축구대회  대표심판
1928. 05. 축구심판회 발기 대표
1928. 06. 전조선육상경기대회 심판장
1928. 11.  전조선축구대회 주임심판
1929. 01. 제2회 전조선빙상경기 결승심판 
1929. 06. 제2회 전조선경기대회 심판장
꾸준히 연구해볼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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