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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4 한량(閑良)은 武와 풍류를 알던 귀족
  2. 2010.03.01 무경칠서武經七書
Report/Martial Arts2010.05.04 01:32

한량이라 불린 이들은 놀고 먹는 사람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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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무(閑良舞)의 한장면(사진출저 국립극장홈페이지)

“너는 왜 한량처럼 빈둥거리니?”

한량(閑良). 우리에게 이 단어는 놀고먹는 사람으로 비유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閑(한)’이라는 글자에는 ‘한가하다’는 뜻도 있지만 ‘아름답다’와 ‘품위가 있다’라는 뜻도 함께 하고 있다. 또 ‘淸閑之歡(청한지환)’을 ‘조용하고 여유(餘裕)가 있는 즐거움’이라고 해석하는 등 ‘한’에 대한 의미는 다양하다.

한량이라는 말은 고려 말에 등장해 조선후기까지 특정한 사회계층을 가리키던 말이다. 직함은 있으나 직사가 없는 무직사관이거나, 어떤 역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를 일컬었다. 사족은 문벌이 좋은 자제나 선비의 자제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사족자제 가운데에는 피역(避役)의 수단으로 호적과 군적에 등재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이렇다보니 이들을 강제로 호적에 등재하고 군역에 충당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궁술 등 무예를 닦은 무역(無役) 한량자제에 대해 무예를 국방력에 흡수하기 위해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의 병종에 속하게 해 단일병종에 귀속시키려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경국대전> 병전 시취도시에는 도시. 매년 봄과 가을에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들이 의정부, 제조, 도총부의 당상관 각 1인과 함께 군사 및 동, 서반의 종3품 이하와 한량인들을 시험 보여 선발한 사례도 발견된다. 특히 무과급제자와 내금위 이외에는 스스로 원하는 바에 따른다는 기록도 있다(都試 每年春秋 本曹訓鍊院堂上官 同議政府諸曹都摠府堂上官各一員 試取軍士及東西班從三品以下 若閑良人 武科及內禁衛外 從自願).

조선 중종 때부터는 무과(武科) 응시를 허용하여 무인(武人) 성격인 한량의 지위가 있었다. 이러한 정책결과 조선후기에 무과 및 잡과 응시자를 가리키거나, 호반(虎班)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한량으로 불렀다. 특히 궁술의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무과의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던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그러면서 당시 한량을 일정한 직사가 없이 놀고먹던 말단 양반계층으로 불리거나 지금처럼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사회의 흐름에 따라 비판될 수 도, 장려할 수 있다


인도의 음악신 간다르바
한량의 의미 변질과 유사하게 불교에서는 '건달(乾達)'이라는 말이 있다. 건달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 중 '간다르바(乾達婆, Gandharva)'라는 말이 음역된 것이다. 간다르바는 수미산(須彌山) 남쪽의 금강굴(金剛窟)에 살면서 술과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향(香)만 먹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음악담당 신(神)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지금도 인도에서는 음악이나 예능계에 종사하는 예인(藝人)을 간다바르라고 부른다.

이후 간다르바인 ‘건달바라’를 ‘건달’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의미는 아무 가진 것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난봉을 부리거나 허풍을 치며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무래도 농경중심 사회였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풍류나 건달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한량이 과연 단순히 놀고먹는 사람들이었을까. 필자는 생각은 다르다. 원래 한량은 시(詩), 서(書), 음악 등에 능하고 풍류(風流)를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족이었다는 점, 그리고 무인으로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접어들어 한량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조선후기에 문관의 10배에 이르는 무관을 선발하기는 했지만 출세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784년 세자책봉을 축하하는 경과(慶科)에서는 2,500명이상을 선발했고, 이 중에서 선전관이라는 왕의 호위무관의 요직에는 7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을 했을까?

문관중심의 사회에서 무관들이 매일 활을 쏘고 무예를 연마하는 모습이 문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문인들에게는 무인들이 놀고먹는 사람으로 보여졌고, 실제 많은 무인들이 한양의 유흥계를 누빈 사실도 있다는 학계의 주장을 보더라도 한량이라는 신분은 비판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과거제도의 문제점이 밝혀지고 있는 지금 무과에서도 화살 한두 발이면 합격하는 등 엉터리 운영 속에 한량의 의미는 변질 된 것은 아닐까.

미래사회는 지식산업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지식산업을 위해서는 창의력이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된다. 창의력은 올바른 여가활동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로 지식산업사회의 평가수단을 여가활용의 양적 질적 근거로 삼고 있다. 고려 말과 조선의 한량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계층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여가는 다양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비난의 대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사회에서 한량은 또 다른 관심소재가 될 수 있다. 한량은 무인이었고,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된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 세상의 멋을 알고 무예를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허건식의 무예보고서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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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
Report/Martial Arts2010.03.01 12:16
책꽂이에 있는 무예관련 한 복사본 책한권을  발견했다.
7가지의 중국병서인 무경칠서(武經七書).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우리는 무경칠서를 가지고 스터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스터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손자병법만 일부 하다가 말았다.
전문적인 한자와 한문공부를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무술을 전공한다는 말을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던 시절. 하지만 이를 계기로 한국학중앙연구원까지 진출한 사람도 있다.

힘들었어도 그 당시에 완벽하게 원전으로 공부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예를 공부하는 대학들의 학과에서 무경칠서는 기본과목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도 많이 해 본다. 중국이든, 우리든 무경칠서에 대한 기본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무경칠서는 무과시험에서도 칠서중 한가지를 선택해 시험을 본 과목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CORPORATION | NIKON D70 | Aperture priority | 2010:03:01 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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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칠서란,

단순히 칠서() 또는 무경()이라고도 한다. 제()나라 손무()가 쓴 《손자()》(1권),
전국시대 오기()의 《오자()》(1권), 제()나라 사마 양저(苴)의 《사마법()》(1권), 주나라 울요(繚)의 《울요자()》(5권), 당()나라 이정()의 《이위공문대()》(3권), 한()나라 황석공()의 《삼략()》(3권), 주나라 여망()의 《육도()》(6권)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송()나라 원풍() 연간에 이들 병서를 무학()으로 지정하면서 ‘칠서’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무경칠서》에 관한 참고서도 여러 종류가 있어, 송나라 증공량()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
무경총요()》(40권), 금()나라 시자미()가 엮은 《칠서강의()》(12권), 명나라 유인()의 《칠서직해()》(12권), 황헌신()의 《무경개종()》(14권), 기타 여러 종류가 있다. 조선에도 수양대군()이 최항() 등에게 편찬시킨 《무경칠서주해()》(10권 5책)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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