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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5 젊은 무예연구가 3인방 (2)
  2. 2010.03.01 훈련도감(訓鍊都監)
Report/Martial Arts2010.06.15 09:00

최근 영상콘텐츠 소재로 무예를 선택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다양한 국가나 기업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이 사업들은 앞으로 이를 시청한 우리 국민들이 무예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지길 기대해 본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점이 많이 발견된다. 일부 제작업체들이 자문을 의뢰해 온 작품들을 보면 전문성이 결여된 허무맹랑한 무예사를 근거로 기획부터 잘못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일부 단체들이 주장하는 짜맞기 무예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보는 관점이 아닌 중국이나 일본이 보는 한국무예사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 무예사연구가 미흡한데도 있지만, 제작사들이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거나, 제작팀들의 연구노력이 부족한데 있다.

이러한 무예사의 오류는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접했던 신문에서도 말도 안되는 왜곡된 역사를 기사화한적이 많다. 대부분 무예가 삼국시대의 신라를 운운하는 등 외부유입무술일지라도 우리것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기사들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무예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장애요인이었다. 

이러한 잘못은 정책을 수반하는 관계자들이나 학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반영되고 잇어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특히 무예관련학과가 개설된 대학에서 무예와 관련된 인문학관련 교과목이 많이 개설되어 있음에도 그 강의의 내용이 의심스러울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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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고려대 허인욱, 한국학중앙연구원 곽낙현, 서울대 박금수선생


그러나 다행스러운것은 최근 일부 젊은 학자들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한국무예사를 연구하고 있는 주변의 일부 연구자들의 연구물들은 우리 무예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연구자들은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 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 허인욱선생과 한국중앙연구원에서 한국사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 곽낙현선생, 그리고 서울대에서 체육사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박금수 선생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예를 전공하거나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있는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40을 바라보는 나이로 열정적으로 한국무예사에 대한 연구에 몰입되어 있다. 이들보다 몇년 앞선 필자로서는 이들의 훌륭한 논문들을 볼때면 그래도 한국무예사에 대한 연구영역이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허인욱선생의 경우는 한국무예사에서 인물연구로 강한 입지를 만들어 가고 있고, 곽낙현선생은 조선시대의 도검기, 그리고 박금수 선생은 무예의 진법과 활용 등에 국내에서 서서히 부각되는 소장파 무예연구자들이라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현재 학위를 받고 활동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활동이기에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이러한 젊은 연구자들이 있기에 앞으로 무예의 활발한 연구를 기대할 수 있다.

이들의 연구활동은 곧 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내 무도관련학회들도 있지만, 이번달 유네스코 자문기구로 승인될 세계무술연맹은 산하에 세계무술아카데미와 세계무술포럼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다행스러운것은 이러한 젊은 학자들이 세계 무술학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다는데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느 분야든 젊은 연구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그 분야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된다. 무예역시 이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나오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한국무예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조성은 정부정책도 있겠지만, 우리 무예계가 포용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앞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열띤 한국무예의 논의와 토론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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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Martial Arts2010.03.01 18:20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곽낙현선생이 한국체육사상연구회에 올린 훈련도감에 대한 글이다. 무술계가 힘이 없고, 재정이 약한 것도 있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도 武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아쉽지만 지금부터라도 훈련도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하다. 전통무예진흥법에 의해 현대판 훈련도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곽낙현선생의 훈련도감 소개글을 살펴보자.


조선후기에 치되었던 중앙군영.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점차 상설기구로 변모한 뒤 1746년(영조 22) 속대전에 올라 법전에 규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양인 의무 군역을 바탕으로 한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는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布)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여러 모순을 드러내어 16세기말에는 그 조직이 허구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왜군에 참패함으로써 당장의 전쟁을 수행하고, 나아가서는 발전된 사회상에 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기 위해 군사 조직의 재정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 급료병으로써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한 것이 훈련도감이다.

이 기구의 창설은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593년 7월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진(陣)에 화포 교습을 의뢰해 포군(砲軍)을 양성하게 한 조처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8월에 왕명으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10월에는 삼도도체찰사로서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정예 군사 양성과 기민구제(飢民救濟)를 목적으로 모병해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참고하면서 명나라 군사의 실제 훈련법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도제조에 유성룡,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이덕형(李德馨)을 임명해 일반 서무를 관장하고 대장(大將) 조경(趙儆)에게 군사 훈련을 맡게 함으로써 관원이 갖추어져 갔다.

이어 11월에 군사를 좌영·우영으로 나눈 데서 시작해 이듬해인 1594년 2월 무렵에는 속오법(束伍法)에 의한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어지게 되었다.

훈련도감군은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가 구분되어 삼수군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수는 약 1,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군사 1인당 1개월에 쌀 여섯 말의 급료를 받는 군사로 모집되어 교대 없이 근무하였다.

종래의 양인 의무병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도감군이 된 자는 유생이나 한량으로부터 공노·사노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적으로 다양했는데, 생계를 잇기 위한 방편으로 들어온 자들도 많았다.

정부는 우수한 자에게는 양인이면 금군(禁軍)으로 발탁하고 천인이면 면천(免賤)하는 등의 특전을 주고, 경기도·충청도의 황전(荒田)을 둔전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란 후의 피폐한 재정 형편에서 군영의 운영비는 물론 도감군의 급료 마련조차 어려운 문제였다. 더구나 훈련도감은 임시군영이며 전란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뒤로 굶주림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자 도망하는 군인이 많아지고 지휘관들마저 많은 수가 결원되었다. 이로써 한때는 그 존립이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도감군의 수는 1602년 삼수미(三手米)를 거두게 되어 경제 기반이 일부 마련된 뒤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병자호란 직전에는 5,000명을 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세기를 거치는 동안 경제 기반의 강화를 위해 도감군에 대한 보인(保人) 지급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총 4만4000여명의 포보(砲保)와 향보(餉保)를 정해 1인당 포 두 필이나 쌀 12말씩을 거두어 주요 재정원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훈련도감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상설군영으로 자리잡고 나아가 5군영의 중심군영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750년 균역법이 실시되자 부족하게 된 재정 부분은 균역청에서 급대(給代)라는 이름으로 받아 메우게 되었다. 그 동안 1669년(현종 10)에 번상군인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설치해 급료병을 점차 축소시켜 혁파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13년 뒤 훈련별대가 정초청(精抄廳)과 함께 금위영(禁衛營)으로 발족되어 191명씩 번상하는 6도 승호(陞戶)를 제외하고는 도감군은 모두 장번급료병으로 유지되었다.

관원은 대장(종2품)을 중심으로 하여 도제조(정1품)와 제조(정2품) 2인, 그 아래로 중군(中軍, 종2품) 1인, 별장(別將, 정3품) 2인, 천총(千摠, 정3품) 2인, 국별장(局別將, 정3품) 3인, 파총(把摠, 종4품) 6인, 초관(哨官, 종9품) 34인 등의 지휘관과 종사관(從事官, 종6품) 6인 등이다.

도제조는 의정 가운데 1인의 겸임으로 훈련대장 유고시에는 대신 지휘를 맡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당연직으로 겸임하는 제조와 함께 훈련도감 운영을 감독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훈련대장은 휘하 군사력이 중앙군영 가운데 가장 크고 정예병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직책이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후 장용영(壯勇營)이나 총위영(總衛營)이 설치되어 있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무장의 인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무장의 직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다.

또한, 중군 이하의 지휘관도 무장 또는 장교가 승진하는 요로로서 구실하고 있었다. 종사관은 재정을 관할하는 직책으로서 4인을 훈련대장이 임명하였다. 그러나 훈련도감에서의 조총과 화약 제조가 중단됨에 따라 19세기 초엽에 2인이 감원되었으며, 2인은 호조와 병조의 낭관 1인씩이 겸임하고 있다.

도감군의 조직은 초기에는 대장과 중군, 천총의 지휘부에서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어 파총이 사, 초관이 초, 기총(旗摠)이 기, 대장(隊長)이 대를 지휘하도록 짜여졌다.

군사의 수효가 늘어나자 도감군의 체제는 위의 틀을 바탕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주력인 삼수군은 사수 7초 833명, 포수 20초 2,440명, 살수 6초 738명 등 총 33초 4,011명으로서 조총과 화포의 중요성이 높아져 포수가 주축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훈련도감에는 이밖에 국왕 호위군인 무예별감 198명과 별무사(別武士)·한려(漢旅)·국출신(局出身) 등의 각종 특수군 및 군사 훈련이나 각종 행정에 종사하는 군관들이 있어서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말기까지는 대개 5,000명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군영의 잡무를 보는 표하군(標下軍)도 2,000명 가까운 숫자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도감군의 지휘 체계는 삼수군 안에서도 보병(살수와 포수)만이 초기의 체제대로 좌우 2부-6사-26초로 편성되어 천총이 지휘하였다.

이외에 마병(사수)은 별장 2인이 지휘하는 부대를 이루었으며, 국출신은 국별장이 지휘하고, 무예별감은 무예청(武藝廳)을 구성하는 등 군인의 성격에 따라 계통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종래의 대부대 단위의 편제로부터 속오법에 입각한 소부대 단위 편제로 바꾼 결과로서 단위 부대 사이의 책임과 질서가 분명하고 부분 연습에 유리한 장점을 지니는 반면 대규모 군사 운동에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도감은 1594년 11월에 수도의 치안을 주임무로 하는 5영에 그 군사가 나누어져 배치됨으로써 이로부터 본래 임무인 군사 훈련 외에 수도 방위와 국왕 호위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종래의 오위가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해 가고 있었다.

이어서 5군영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御營廳)·금위영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면서 궁성과 서울의 방위를 맡았으며, 이 단계의 모습이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훈련도감은 핵심에 위치했으며, 도감군은 국왕의 호위를 비롯해 궁성과 도성의 파수 및 순라 등의 여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다른 군영의 군사와는 달리 도감군은 거의 전부가 매월 쌀 49말 정도를 받는 장번급료병이어서 대부분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19세기 전반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력이 축소되는 가운데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던 훈련도감은 1861년(철종 12) 도망이 심한 6도 승호(陞戶)의 번상이 폐지되었다. 이어 1881년(고종 18)에 군제 개혁으로 별기군(別技軍)이 설치되어 신식 군대 조직이 이루어지자 그 이듬해 결국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續大典, 大典通編, 萬機要覽, 朝鮮時代軍制硏究(車文燮,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陸軍本部, 韓國軍事硏究室, 1976), 朝鮮後期中央軍制의 再編(車文燮, 韓國史論 9, 國史編纂委員會, 1981),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吳宗祿, 조선정치사 18001863, 한국역사연구회, 1990), 朝鮮後期保人硏究(金甲周, 國史館論叢 17, 1990).


원문출처 : http://cafe.daum.net/sportia  한국체육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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