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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1 근대유도의 창시자, 가노지고로
Report/Martial Arts2010.06.11 15:59

아래의 글은 《유도론》의 저자 김상철교수님과 필자가 1999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일본유도연구'라는 주제로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에서 정리한 글이다. 이 당시만 해도 근대유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강도관유도와 강도관유도의 창시자 가노지고로에 대한 소개가 국내에서 부족한 시기였다. 당시 정리한 내용을 좀 더 요약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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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지고로는 1860년 10월 28일 가노지로사꾸마레시가의 3남으로 효고겡 무꼬군 미가게초 하마시가시에서 태어나 어렸을때의 이름은 신스께였다. 메이지 3년, 11살이었을 때 고향에서 동경으로 상경하여 가기가라초에서 부친과 함게 살게 되었다. 상경한 지고로는 가까운 요고꾸의 세이다쯔즈꾸에 다니게 되어 우부가타게이또라는 사람에게 학문을 배움과 동시에 간다의 미쯔꾸리 슈헤이라는 학당(쥬꾸)에서도 학문을 닦았다.

메이지6년, 14살때에는 이꾸에이 즈꾸(학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즈꾸는 네델란드사람이 선생이었고, 독일사람이 조교였으며, 모든 학과는 영어로서 진행되었다. 가노는 이전에 미즈꾸리 슈헤이의 즈꾸에 다닐 때 어느정도의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당시에 그들사이에 강한 사람이 인정을 받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신체가 작았던 가노로서는 여러모로 불리하였다. 또한 병은 없었지만 매우 허약해 보이는 체구인탓에 항상 그들 사이에서는 약해 보였다.

학문에서는 타인에게 지지않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소외당한 것에 대해 항상 불만을 지니고 있어 자신을 강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였다. 때때로 어렸을 때 일본에는 유술이라는 것이 있어 약한자가 강한자를 이길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상기하여 유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때 가노의 집에 자주 오던 자들중에 나까이 우메이나리라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옛날에 유술을 배운적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여러 가지 가타(形)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당시에 유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또한 고이시가와 마루야마초에 있던 부친의 별장에서 일하던 편동유사라고 하는 사람이 가끔씩 유술의 형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밖에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에 출입하던 비후출신으로 이마이겐시로라고 하는 사람이 큐신류라고 하는 유술을 배운 사람에게도 부탁하였지만, 그 역시 거절 당하였다. 이와같이 유술수련이 불가능한채로 학업에 열중하였지만, 보다 강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속에 있었다.

메이지 7년 4월21일 동경외국어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이구에이즈꾸에서 동경외국어대학의 영어학부에 전학하였고, 이 학교가 얼마 있지 않아 영어부가 독립하여 관립 영어학교로 되었다. 메이지 8년 개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개성학교에는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풍조가 이꾸에이즈꾸에 있을때보다 더욱 강하였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허약했던 가노는 더욱더 유술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에게 유술가를 소개해 달라고 여러차례 부탁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가 우선이라고 하여 동의하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상당한 연령에 있었고, 신체를 강하게 하기위하여 유술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적당한 스승을 찾으려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명치10년 18살 때 동경대학이 창설되어 그 대학의 문학부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지만, 입학당시 언뜻 정복술을 하는 사람이 유술가로서 유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정복이나 접골이라는 간판이 있으면 직접 들어가 유술을 한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며 찾아 다녔다. 그러나 유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에서는 과거에는 유술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유술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람들이 더많았다. 이런식으로 스승을 찾아 헤매고 다니던 때에 니혼바시(日本橋)의 민교초 거리에서 벤케이바시에서 멀리않은 곳에 접골간판이 보였기 때문에 들어가 물어 본 결과, 야기마사스게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골격이 장대하고 실로 위풍당당한 대장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유술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가만히 가노를 살펴본 뒤에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자기자신이 유술을 배우고 싶다는 처지를 설명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야기노인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이소마타우에이몬의 제자로서 그 면허를 받을 정도로 옛날에는 전문적으로 유술을 하였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유술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 추세였기 때문에 접골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왠만하면 가노의 희망을 들어 주고 싶지만, 이곳은 8장의 다다미공간으로 비좁고 게이코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니혼바시의 모토다이꼬초에 자신의 동문인 후꾸다야스께라는 사람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유술을 그만 두었지만 이 후꾸다는 도장을 가지고 있으니 한번 가 보아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여기에서 후꾸다를 방문하니 여기서도 겨우 10장의 다다미공간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다다미 한 장정도는 계단으로 사용되고 있어 나머지 9장이 도장으로서 사용되었고, 다음의 3장정도의 공간이 접골의 치료소가 되어 있어 6장밖에는 도장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공간도 때로는 환자의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노는 자신의 바라던 희망이 이루어져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텐진신요류의 유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후꾸다의 문인으로 게이코를 하러 온 관원들은 가끔씩 오는 사람이 4-5명정도였고 매일 오는 사람은 1명이었다. 격일로 오는 사람은 1명정도였다. 그중에서 매일 다니고 있던 사람은 선생으로부터 형을 배워 그 것을 관원들에게 게이코를 시키고 선생과 동료들과 자유연습을 하는 형태의 연습이 매일 계속되었다.

이때의 연습은 찰과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온몸이 만진창이 되도록 연습하였던 시기였다. 이렇게 열심히 한 덕분으로 기량은 더욱더 늘게 되어 메이지 12년 미국의 전대통령(18대)인 글랜튼장군이 왔을 때 시부자와에이이찌 라는 사람에게 초대되어 이소 마사토모, 후꾸다 야스께와 그밖의 유술 명가와 함께 아스까야마에 있던 시부와자별장에서 유술시범을 보였다.

메이지12년 8월 14일 후꾸다 스승은 52세로 죽게 되었고, 후꾸다의 제자들중에는 난도리로서는 가노보다 강한 제자가 있었지만 형과 난도리를 병행해서 수행하였고, 매일 도장에 나온 제자는 가노뿐이 없었고 그 게이코 연습에 열심히 한 점을 고려해서 후꾸다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받아 후꾸다가에 전해져 오는 전서 1절을 물려받게 되어 후꾸다의 도장을 위탁받았다. 여기서 한때 그 도장을 맡아 연습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혼자서 도장을 운영할 자신이 없었고, 더욱이 더 높은 수준의 수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였다. 그레서 새롭게 인문한 것이 간다에서 도장을 열고 있던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의 이소마타우에이몬의 내제자로서 이소가에 입적하여 3대째의 도장을 상속받고 있던 이소마사토모의 도장에 인문한다. 이소도장에서는 후꾸다도장의 동료 후꾸시마 겐요시와 함께 입문하게 된다.

당시에 마사토모는 이미 60세정도의 노령으로서 자신이 직접 난도리 지도를 하지 못하였지만 형의 명인으로 가타의 가르침은 자기자신이 직접하고 있었다. 난도리는 사또와 우라마쯔라고 하는 사람이 간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가노와 후꾸시마도 후꾸다 도장에서 상당한 출현을 하고 있던 상황이였으므로 이 2사람도 입문과 동시에 간사에 취임하게 되어 앞의 2사람과 함께 보조사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도장에 매일 출석하는 사람은 30명정도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휴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가노 혼자서 대부분의 사람을 상대로 매일 형을 수련하였다. 또한 난도리도 매일 30인을 상대로 수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형연습과 난도리의 연습으로 늦게까지는 11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때는 연습과다로 인하여 길을 걸을때는 비틀비틀거리며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사토모선생은 체격이 매우 작았고, 젊었을 때부터 난도리는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에는 명인있지만 난도리에서는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소의 도장에서는 난도리는 거의 자신이 가르치면서 선생으로부터는 형에 대한 것은 매우 많이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와같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 이소는 명치 14년 6월 62세로 죽게되어 또다시 스승을 잃게 되었고, 다시 새로운 스승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세 번째의 스승은 기또류의 이이꾸보고넹이다. 이이꾸보는 가노의 대학친구 모토야마마사시사의 부친인 마사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모토야마는 법학부의 제1회 졸업생으로 명치 12년에 졸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노보다 선배였고, 학과도 틀렸지만, 가노가 대학에 입학한 때에 대학에서 야구가 시작되어 가노와 고다이류사꾸(오대용작)는 투수, 모토야마와 시오다라는 사람은 포수를 하였다. 그래서 모토야마와 매우 친하였고, 조정(漕艇)이나 소풍에도 항상 함께하는 절친한 관계였다.

모토야마의 부친은 전 막부의 강무소에서 기또류 유술의 선생을 역임하였고, 상당한 기또류 유술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노는 전에 배운 텐진신요류와는 다른 유파여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 사람은 가타의 명인으로 난도리는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제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노의 스승에 대한 가르침을 갈구하는 자세에 감동한 그는 자신이 선생으로 모시고 싶었던 유술의 명인을 소개하고 싶다고 하여 가노는 찾아 가게 되었다. 그가 바로 이이꾸보고넹이었다.

그 역시 강무소의 유술사범으로 가노는 처음으로 기또류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텐진신요류와 기또류의 기술차이에 많이 놀랐다. 텐진신요류에서는 조르기와 관절기, 눌러굳치기 등이 주된 기술이었고, 던지기 , 메치는 어느정도 있었지만, 배되치기(도모에나게), 아시바라이, 허리기술(고시나게) 등은 기또류와는 기술사용방법이 많은 차이가 있었고, 기또류의 가타와 텐진신요류의 형은 서로 그 기술상 시각에서 차이가 있었다. 또한 이이꾸보고넹은 47세 연령이었지만, 난도리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가노도 열심히 게이코를 하였고, 처음에는 가노도 이이꾸보에게는 절대적인 열세였다. 여기에 가노는 성심껏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여 신중하게 기술을 창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술수련에 열중할때도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열심히 하여 명치 14년 7월 9월 정치과와 경제과를 동시에 공부하며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당시의 제도에서는 문학부는 정치, 경제, 철학, 국문학의 4부분으로 나누어져 그 중에서 국문학은 독립하였지만, 그밖의 학과는 2개학과씩 전공할 수 있었고, 더욱이 정치, 경제, 철학의 3과는 3년간 공통전공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외에도 1년 더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전공할 당시 명치 15년 1월에 학습원에 새롭게 연수과가 설치되어 1월 15일 강사로 위촉되어 정치학과 경제학과에서 강의하였다. 이외에도 가노는 유술이외에 야구, 체조, 배구, 조정 등 다양한 운동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유술에 매력을 지니고 매진하였다.

가노지고로는 18세때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를 후꾸다(福田八之助)와 이소마사지(磯正智)에게 배웠으며 20세때에는 오꾸보(飯久保恒年)으로부터 기또류(起倒流)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유파의 교육적 가치가 대단히 큰 것임을 깨달았으며, 아울러 다른 유파에 관해서도 비교 연구하여 유술이 정신과 신체발달에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유파에는 그 나름대로 장·단점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이것을 어느정도 개량하면 무술로서 뿐만 아니라 체육으로서도 유익하며, 정신의 수양 혹은 처세법으로도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노지고로는 배운 유술 가운데 텐진신요류(天神眞楊流)의 급소지르기와 굳히기, 기또류(起倒流)의 메치기 기술을 중심으로 타케우찌류(竹內流)의 체포술(捕縛), 세끼구찌류(關口流)의 낙법(落法) 등 다른 많은 유파를 비교 연구하여 실제로 연습을 실시함으로써 원리에 맞는 것은 취하고 맞지 않은 것은 버렸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체계와 방법을 확립하였고, 자유연습과 본의 연습에 의해 체육의 목적을 이루고 승부의 방법도 일종의 지육(知育), 덕육(德育)도 될 수 있도록 고쳤다. 단순한 무술에서 도(道)로 지양(止揚)되어 여기에 유도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었다.

유술을 유도로 개칭한 이유를 살펴보면 옛날부터 유술은 전쟁에서 우선 활의 위협으로부터 시작되어 나중에는 도검(刀劍)에 의한 싸움으로 이행되어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졌을 때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무술이다. 유술은 상대를 넘어 뜨리는 기술 외에 상대를 찌르기도 하고 차기도 하는 급소지르기 기술, 상대의 손목과 팔꿈치를 꺾는 관절기술, 상대의 목을 졸라서 죽이는 조르기 기술 등 많은 기술을 갖춘 종합무술이다.

유술의 시대에는 생명을 걸고 했던 격렬한 승부는, 창조된 안전한 경기 속에서 행하여지고 있으며 기술로부터 도에 들어가는 동양적인 무도관도 현재의 인식속에 살아있다.

술(術)은 기술(技術)을 의미한다. 따라서 술(術)에서 강조되는 것은 기술 그 자체이다. 술(術)을 행하는 가장 큰 목적은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道)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다. 그리고 자신의 심신을 향상시키는 삶의 방법을 의미한다. 비록 유도와 유술의 기술이 닮아쓸지라도 유도의 수련과 훈련의 가장 큰 목적은 유술과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도(道)를 포함하고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불도(佛道), 다도(茶道), 서도(書道) 등의 각각은 단순한 행위의 차원을 떠나서 자신의 인격함양의 의미를 갖고 있다.

가노의 유도는 승패를 떠나서 심신을 단련하는 데 목적을 둠으로써 승패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술과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術에서 道로 전환은 평화와 건강의 원리를 뜻한다.

術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로서 힘의 과시를 주제로한 폭력의 원리(공격적)이다.

道는 폭력을 부정하는 평화의 원리로서 순수한 방어논리(나를 지키는 수단)이다.

이러한 논리는 도(道)가 본체로, 술(術)은 부수(部隨)된 것으로 도에 들어가는 수단이 되었다. 술(術)로부터 지양(止揚)하여 인간생활 전반에 통하는 대도(大道)로 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노는 술(術)을 도(道)로 바꾸어 승부법으로서의 유도, 체육법(體育法)으로서의 유도, 수신법(修身法)으로서의 유도로 나누고 이것을 '유도의 세 부문'으로 이론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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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또칸의 모습

1882년 1월 가노는 당시 귀족들이 경영하던 학습원(學習院)의 강사가 되어 숙소를 시모다니영창사(下谷永昌寺)로 옮기고, 처음으로 가노주꾸(嘉納塾; 학원)을 설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5월에는 영창사(永昌寺)의 마당에 12장의 다다미를 깔아 도장을 만들고 이를 '고도깐(講道館)'이라 이름하였다.

같은 해의 9월 영창사(永昌寺)에서 진다(神田)로 옮기고 1886년 98명, 1887년 292명, 1888년에는 378명, 1889년에는 605명으로 늘었으며 후지미(富士見)시대에는 1,40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당시의 비용은 모두 가노가 부담하였다. 수련생들이 모두 귀족계급의 자산가들이었으므로 강도관(講道館)의 비용은 모두 여기에서 충당되었다.

이 후지미(富士見)시대에 고또칸의 형태는 거의 체계화 된다. 입문자의 서약서, 원단식(元旦式), 홍백경기, 월례경기 등의 여러행사가 이 시대에 결정되었다. 기술적으로도 안정되어 현재에도 행해지고 있는 '메치기 본', '굳히기 본', '부드러운 본', '5가지 본' 등의 기본이 이 때에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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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고또칸의 수련모습

가노는 여러가지 유술(柔術)의 기법(技法)을 이어받아 유도(柔道)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는데, 유술이라 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 근본이 '도(道)'가 있고 '술(術)'이란 오히려 그 응용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가르침에는 먼저 도(道)로 시작하여 그 위에 응용의 술(術)을 가르치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나 후꾸다(福田), 기(磯), 오꾸보(飯久保)의 3명에게는 쥬우쥬쯔(柔術)란 명칭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전연 다른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시키는 것도 그렇고 하여 '유(柔)'의 한 자만을 쓰기로 하여 유도(柔道)로 하였다.

1882년 5월에 유도를 연구·지도하기 위하여 도장을 개설하였는데 명칭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도(道)를 중시하고, 도(道)를 넓히고 도(道)를 강의(講)하는 곳(館)이라 하여 '고도깐(講道館; Kodokan)'이라 명명하였다. 단순히 무술을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구태의연하게 무술의 도장이라 한다면 연무관(鍊武館), 상무관(尙武館)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을 피해 '강도관(講道館)'이라고 한 것은 "도(道)는 근본, 술(術)은 응용"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유도는 과학적인 원리에 맞추어 공격과 방어의 방법을 가르치고 여기에 가미하여 신체의 합리적인 육성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배경으로 단순한 무사의 마음 가짐뿐만 아니라 문무의 도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술과 체육과 수심(修心)의 도(道)를 합한 것이 유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가노는 본(本)과 자유연습의 관계에 관해 "마차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도의 본(本)이란 마치 문장을 쓰는데에 있어 문법과 같은 것이다. 난도리(자유연습)는 작문의 연습이다. 아무리 문법에 정통하다고 해도 곧 바로 명문을 쓸수는 없다. 또 문법도 알지 못하고 엉터리로 문장을 쓸 수도 없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유도에 있어서도 본을 배우지 않으면 공격 방어 여러면을 이해하고 익숙하여 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오로지 본만 수련한다면, 순서에 따라 일정한 틀로 연결은 되지만 만약 상대가 본에 없는 수법으로 공격해 오는 경우 그 응수에 곤난하여 패배하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 상대가 어떤 변화기술을 걸어 와도 이것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난도리(자유연습)가 필요하며, 본과 난도리(자유연습)의 두가지를 함께 수련할 때 비로소 완전한 수련이 된다.

처음의 '메치기의 본'은 10가지였다. 이 본은 주로 사용되는 신체의 부위에 따라 손기술, 발기술, 허리기술, 바로 누우며 메치기기술, 모로 누우며 메치기기술로 분류하여 메치기 기술의 이치를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후 새로운 메치기, 굳치기 등의 기술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현대 유도를 창시한 가노가 유도경기의 방법을 오직 일본의 여러 유술 유파의 장점에서만 따온 것은 아니다. 그는 1930년에 공인된 레슬링 규정을 참고하기도 하였다. 일본 강도관의 자료실에는 가노 지고로가 생전에 쓰던 메모를 전시하고 있다. 가노 지고로가 친필로 깨끗하게 정서한 내용은 '레슬링심판규정'이라는 제목하에 북미합중국 아마추어 레슬링규정(1930공인)에 관한 경기장 설비규정과 선수의 복장 등에 관한 것이다. 또 강도관 자료실의 전시자들도 유도가 레슬링규정을 참고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현대의 유도는 경기장과 선수복장 등에서 레슬링의 제규정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도는 더욱 발전하여 191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에 "체조의 격검(검술), 유술은 부과할 수 있음(수의과)"이라 하여 정식과목으로 채택된다. 그리고 세계 제1차대전을 전후하여 일본 국민의 상무적 기풍으로 1914년 제1회 전국고등전문학교 유도대회가 개최되고, 1930년에는 제1회 전 일본유도 선사권(選士權)대회가 개최된다. 뿐만 아니라 가노는 해외의 유도보급을 위해 선수들을 이끌고 직접 한국, 중국, 유럽 등을 순방, 일본 유도를 세계에 소개하였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유도도 군사적 실전을 위한 훈련으로 변질 규정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폐전으로 인해 무도(武道)라는 용어가 사용금지 되는 등 대단한 박해를 받게 되지만, 경찰은 그래도 유도와 검도를 실시하여 그 전통을 이었으며, 학교 유도의 금지령해제를 원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1950년 학교유도가 부활되고, 1951년 6월에는 전 일본학생유도 연맹이 결성된다.

1952년 일본은 국제유도연맹을 창립하고, 가노의 아들인 가노리세이(嘉納履正)가 회장에 취임한다. 1956년에는 동경에서 제1회 세계유도 선수권대회가 열리고, 1960년 로마올림픽대회 총회에서는 유도를 올림픽 선택종목으로 결정한다. 이제 유도는 일본의 유도가 아니라 인류 공통의 무도스포츠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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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MACI somakorea